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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남액션배우 신일룡의 영화와 사진, 근황

     

    영화배우 신일룡은 우리나라 70년대에 큰 족적을 남겼던 대표적인 액션미남배우이지요.

     

    그 시대에 드물게 잘생긴 얼굴을 가진 미남배우였지만, 신일룡은 맬러영화보다 액션영화나 무협영화에 더 많이 출연해서, 여성팬 못지않게 많은 남성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액션배우랍니다.

     

    70년대 많은 여성팬들과 많은 남성팬들 양쪽 모두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액션배우 신일룡은 70년대 중반 무협액션계의 큰 아이콘이었답니다.

     

    신일룡은 선굵고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미를 지닌 쾌남배우로, 한국은 물론 홍콩에서도 많은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며, 홍콩영화계에 진출해서 여러편의 무협영화에 출연해 높은 인기를 끌었답니다.

     

    신일룡은 69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 이듬해인 1970년도에 전쟁과 인간이라는 영화로 데뷔한 이래, 86년도까지 80편이 넘는 수많은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왕성한 배우활동을 벌였었죠.

    신일룡은 길거리캐스팅됐는데, 신일룡을 캐스팅한 사람은 바로 유명한 신상옥감독이랍니다.

    신상옥감독은 당시 우리나라의 최대의 영화사 신필름을 보유한 당대 최고의 명감독이었지요.

      

      

       신감독은 체구가 튼튼하고 박력 넘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쾌남아 신일룡을 전격 캐스팅하고, 자신의 성을 붙이고 용()처럼 크게 뻗어가는 명배우라가 되라는 의미에서 신일룡이라는 예명을 붙여주었으며, 신일룡의 원래 이름은 조수현으로 발라드가수 조정현의 친형이랍니다.

     

    신일룡은 자신의 이름처럼 70년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수많은 명작품에 출연해서 우리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답니다.

     

    신일룡은 데뷔 첫해의 작품인 이조괴담에서도 굵직한 포도대장역을 맞아 열연하면서, 아주 강인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서 호평을 받았답니다.

     

     

    신일룡은 배우 초창기에는 총각선생같은 멜로사회물에 다수 출연해서, 박력있고 정의감 높은 사회의 대변자 같은 역할을 많이 맡으면서, 영화배우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높여왔지요.

       

    그 당시 신일룡에 대한 이미지는 정의로운 인물’ ‘강직한 남성으로서 그의 영화인생 전반기는 우리사회가 열망하는 정의로운 영웅 같은 이미지가 강했으며,

    이러한 캐릭터가 선굵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신일룡의 외모와도 잘 맞아떨어졌답니다.

       

    이렇게 청춘사회물에 출연해오던 신일룡이 73년도 액션영화 동풍에 출연함으로써, 그의 멋지고 우람스러운 근육을 뽐내면서 남성미 넘치는 무술액션을 펼친답니다.

    신일룡은 영화 동풍에서 검찰로 분해서 선상에서 마약밀매 조직단을 적발하고, 멋지고 박력있는 액션연기를 펼쳤답니다.

     

      영화 '동풍' 포스터

     

    이 영화 동풍이 신일룡이 처음으로 출연한 액션영화인데, 이 영화에서 멋진 근육과 박력있고 남성미 넘치는 연기와 액션을 펼침으로써, 훗날 신일룡이 홍콩에 스카웃되어 홍콩무협영화에 출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신일룡은 고려대를 다니면서 대학 농구선수로 활동했을 정도로 운동에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고, 합기도 4단의 고단자라고 합니다.

     

    워낙 젊어서부터 운동을 잘했고 운동신경이 뛰어났던 신일룡은 합기도 4단의 무술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의 탄탄한 근육과 날렵한 운동능력을 높이 샀던 영화감독들이 70년대 중반부터 그에게 한창 유행했던 액션무술 영화에 출연을 권유하게 됩니다.

     

     

    179cm의 큰 키에 얼굴도 미남에다 근육질의 멋진 몸매와 카리스마를 갖춘 신일룡이 합기도 4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홍콩의 영화사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왔고, 드디어 신일룡은 홍콩에 진출해서, 본격적인 무술영화 배우로 활동하게 된답니다.

     

    이 당시 신일룡은 여러편의 TV광고에 출연했는데, ‘비바’ ‘써니텐’ ‘브라보콘등의 광고에 출연해서, 핸섬한 얼굴과 우람한 근육을 선보여서,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이 멋진 근육질의 신일룡 모습을 본 홍콩의 골든하베스트사에서 신일룡에게 스카우트제의를 해왔던 것이지요.

     

     

    70년대 중반 이소룡의 영향으로 한창 무술영화들이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시절이었는데, 무술천재 이소룡이 죽은 이후, 홍콩의 골든하베스트사에서는 이소룡을 대체할 수 있는 무술고단자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던 시절이랍니다.

     

    이소룡을 잃었던 홍콩 영화계에서 이소룡처럼 태권도 발차기를 잘하는 한국 무술배우들을 대거 영입해서, 홍콩무술영화의 부흥을 꾀합니다.

     

    이때에 홍콩무술영화계에 입성했던 무술스타들이 바로 황정리와 황인식, 왕호같은 무술스타들로서, 이들은 실제로 무술고단자들이랍니다.

     

    신일룡 주연영화 '심판자'의 포스터

     

    그리고 신일룡도 1974년도에 드디어 홍콩영화계에 진출해서, ‘심판자라는 홍콩무술영화를 찍으면서, 본격적인 무술스타로 활동하게 된답니다.

     

    신일룡은 무술영화 심판자에서 특유의 우람한 근육과 멋지고 화려한 발차기기술을 선보이면서, 수많은 홍콩관객들을 사로잡았으며, 이 후 멋진 무술스타로서 인기를 끌게 된답니다.

      70년대 중반 당시 우리나라의 주간지 '선데이서울'에서는 신일룡이 골든하베스트사에 스카웃되어 이소룡의 후계자로 활동한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첫 홍콩무술영화에서 입지를 다진 신일룡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홍콩무술영화에 출연하면서, 주가를 높여나가게 되는데요.

     

     

    그렇지만 신일룡도 황인식이나 황정리처럼 한국인으로서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답니다.

    70년대 당시 홍콩영화계에서는, 홍콩인이 아닌 외국인을 절대로 주연배우로 기용하지 않는 관행이 있답니다.

    그리고 이소룡의 후계자 자리는 홍콩출신인 성룡에게 넘어가고 말지요.

     

    1970년대 후반 당시 홍콩의 유력한 영화사인 골든하베스트사는 이소룡의 포스트(후계자)로 성룡을 선택했으며, 그당시 발차기도 제대로 못하는 성룡을 전면에 내세워서 홍콩무술영화의 부흥을 꾀했는데,

    룡의 코믹한 액션이 가미된 그의 코믹액션영화들이 크게 히트하면서, 성룡은 단번에 홍콩무술영화의 히로인으로 급부상하게 된답니다.

     

    그래서 잘생긴 외모와 우람한 근육, 멋진 발차기실력을 겸비한 신일룡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게 되고, 성룡이나 양소룡 같은 홍콩스타들의 후광에 밀려서, 그들의 액션을 받쳐주는 악당역으로 밀려나고 맙니다.

     

    인물이나 발차기기술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등에서 신일룡과 상대도 되지않는 성룡이 오히려 주연으로 분하고, 기가 막히게도 진정한 주연감인 신일룡은 조연인 악역으로 분해서 출연한 77년도 홍콩무술영화가 바로 신당산대형이랍니다.

     

     

    그렇지만 신일룡은 신당산대형에서도 잘생긴 외모로 인해 성룡보다 훨씬 더 우월적인 존재감으로 스크린샷을 받았으며, 이 영화를 본 많은 한국관객들은 주연과 조연이 서로 뒤바뀌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신일룡은 이 신당산대형에서 멋진 앞차기와 뒤돌려차기의 화려한 무술액션을 선보이면서 성룡보다 더 한 수 높은 무술실력을 발산해서 호평을 받았답니다.

     

    누가 보더라도 신일룡이 주연감이었고, 성룡은 쇼브라더스의 백그라운드로 주연자리를 꽤찬 행운아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아뭏튼 신일룡은 비록 홍콩에서 조연으로 많이 출연했지만, 홍콩에서 수많은 영화들에 출연해서 나름 명성도 높이고, 돈도 많이 벌어서 한국으로 귀환합니다.

     

     

    그리고 그 후 신일룡은 한국에서 제2의 화려한 영화인생을 펼쳐나가는데, 82아벤고공수군단’ 83적도의 꽃’ ‘일송정 푸른 솔은’ 84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같은 명작품을 남기면서, 또다시 명배우로서 명성을 이어나갑니다.

     

    그리고 1986년 정윤희와 함께 영화 황진이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또다시 멋진 연기를 펼쳐보였고, 그 후 드라마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갔지요.

     

    그리고 신일룡은 90년경에 우리연예계에서 사실상 은퇴하고 외식사업을 야심차게 전개해 나갔는데요. 또한 신일룡은 1987년도에 경제통신사 사장의 막내딸인 채희종씨와 혼인하여 가정을 일구었답니다.

     

     

    80여편의 영화에 출연해서 영화인으로서 성공을 거둔 신일룡은 90년대부터 외식사업에 뛰어들어서 또다시 성공신화를 이어나갑니다.

     

    신일룡은 레스또랑, 한식당, 커피전문점 등을 운영하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가 운영했던 시애틀 베스트커피는 전국에 20개 직영매장을 운영할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답니다.

     

    그리고 신일룡은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로 우리나라가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이 번 돈으로 마련한 포천일대의 50억대의 땅 2만평을 모두 공익 문화센터 건립에 쓰라고 기부했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까? 자신이 힘들게 모아서 산 수만평의 땅을 자신과 직접 연고도 없는 한국 문화계의 발전을 위해서 선뜻 내놓을 것이지요. 신일룡은 정말 배포가 큰 인물이랍니다 

     

      신일룡의 최근의 사진

     

    이렇게 요식업계 CEO로서 승승장구하면서 실패를 모르고 성공만 했던 신일룡,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후 영화배우로서나 CEO로서나 실패를 몰랐던 신일룡이 처음으로 실패를 맛보았다고 하네요.

     

    신일룡은 제주도에 카지노호텔을 짓는 사업을 추진하던 중 차질이 생기면서 수백억대의 재산을 한순간에 날리게 된답니다.

    그동안 너무 실패를 몰랐기 때문인지, 너무 과도하게 야심차게 추진했던 호텔사업이 실패해 큰 손해를 보게 된답니다.

     

    그렇지만 그대로 물러날 분이 아니랍니다. 신일룡은 그 후에 또다시 새로운 외식사업을 시작했는데, 청계산에 수제로 직접 만드는 웰빙 호두파이 점포를 열고, 남녀노소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면서 점포사업도 큰 활황을 겪게 된답니다.

     

    아몬드가루가 60% 이상 들어가는 아주 건강에 좋고 달콤한 호두파이 프렌차이즈인 W.NUT PIE 사업을 시작해서, 다시 재기의 꿈을 꾸는 있는 신일룡씨는 참 대단한 분이라고 여겨진답니다.

     

    신일룡은 48년생으로 이제 나이가 70세인데, 나이에 전혀 개의치않고 자신의 제2의 사업인생을 펼쳐나가는 모습이 매우 씩씩하고 든든해 보입니다.

     

     

    과거 화려한 영화배우였지만, 물러날 때를 알고 물러났던 신일룡, 이제는 고의의 나이에도 또다시 제2의 외식산업을 활기차게 열어나가고 있는 그가 많은 중년인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신일룡 영화 '심판자' 외 하이라이트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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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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