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명성황후 민비 시해사건, 살해이유와 초상화, 을미사변

     

    민비라는 칭호로 알려진 명성황후는 조선의 26대왕 고종의 왕비로서, 조선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비라고 할 수 있다.

     

    명성황후 민씨가 명성을 크게 떨친 이유는 두가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조선의 왕비 중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렸던 왕비이기 때문이며, 또다른 하나는 일본인들에게 비참하게 참살당한 국모라는 이유 때문이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의 정비로서, 고종과 정사를 함께 상의하며 정사를 공동운영했던 왕비로서, 어떻게보면 고종과 권력을 양분했던 조선권력의 실권자였다.

     

    조선의 그 어떤 왕비도 명성황후처럼 권력의 최고정점에서 왕 못지않은 최고권력을 휘둘렀던 왕비는 없을 것이며, 당시 조선에 파견되었던 외국 공사들도 고종보다는 오히려 명성황후를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인물로 주목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명성황후는 구한말 어려웠던 시절에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위해서 노력했던 총명한 왕비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에,

    명성황후는 민씨 친정세력을 끌어들이고 사치를 일삼고 국정을 농단함으로써, 결국 조선의 멸망을 앞당겼던 왕비라고 하는 평가가 그것이다.

     

     

    명성황후 민비가 현명한 왕비인지, 어리석은 왕비인지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그녀가 왕비가 되었을 시기에는 조선의 국력이 너무나도 열악해져 있었고,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이 너무나도 강한 국가로 커져 있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는 1860년대초부터 1870년대 초까지 권력을 장악해서 왕보다 더한 권력을 행사했던 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는 영특한 왕비라고 할 수 있다.

    대원군은 고종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 고종이 어리다는 핑계로 자신이 직접 10년 동안 섭정을 행사해오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다.

     

    나약했던 고종은 스스로 아버지인 대원군을 몰아낼 힘이 없었기에, 이때에 왕비인 명성왕후가 나서서 최익현이 상소를 올리도록 유도해서, 대원군을 축출하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확립해주는 데 큰공을 세웠다.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초상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대원군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만들어주었던 점에서, 명성왕후의 총명과 공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명성왕후의 결단과 책략이 없었다면, 어쩌면 대원군은 영원히 권력을 놓지않고 고종을 허수아비왕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1873년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상소로 인해서, 대원군의 10년 권력은 끝이 나고, 고종이 직접 통치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국정을 직접 운영해나갈 수 있게 됐다.

     

    고종의 친정체제를 확립한 후에, 명성황후 민비는 의붓오빠인 민경호 등 민씨 친정세력들을 권력의 중심으로 대거 끌여들이면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후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폐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고, 일본과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들과 국교를 수교하면서 나름대로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명성황후가 집권한 시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녀의 개혁정치는 한계에 부닥칠 수 밖에 없었다.

     

    구 대원군의 기존 잔존새력의 견제, 조선의 국권침탈을 노리는 일본의 공작과 서구열강들의 조선정치 관여 등 일본과 외국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위태위태하게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고종과 명성황후는 제대로된 개혁정치를 펴나갈 수가 없었고, 시행착오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이것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개혁정치의 발목을 잡는 방해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일본의 침략야욕과 동학혁명 등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듯이 어렵게 국정을 운영해났다.

     

     

     

    명성황후 민비 시해사건 (을미사변)

     

    동학농민 혁명이 삼남지방에서 거세게 일어나자, 고종과 민비는 농민반란에 두려움을 느끼고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한다.

     

    청나라군사가 조선에 파견되자 일본도 함께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는데, 결국 한반도에서 동북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청나라군과 일본군간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두나라간 전쟁에서 일본군이 연승을 하면서, 청군은 패퇴하여 조선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승리한 일본군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하면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해나간다.

     

    그런데 명성황후는 청일전쟁 승리 후, 노골적으로 침략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더욱 밀착한 외교를 전개해 나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국력이 더욱 커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게되자, 일본은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계획을 만들게 된다.

     

    이로 인해서 1895년도에 을미사변이라는 조선 국모시해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895108일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불행하고 치욕스러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왕비이자 국모가 일본의 낭인(깡패)들에게 무참히 척살당하고 능욕까지 당했던 조선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가장 끔찍하고 참혹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조선의 국모이자 왕비인 명성황후의 제거를 시도했던 것인가?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했던 1895년도의 한반도의 국제정세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후, 일본은 군대를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는 등 일본의 침략의 야욕이 본격화되자,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날로 힘이 커지고 조선애 대한 간섭을 노골화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당시 동북아에서 정치적 역량이 컸던 강대국 러시아의 힘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이제이,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또다른 오랑캐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으로, 당시 정치적 식견과 책략에 뛰어났던 명성황후는 날로 강성해지고 있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

    해서,

    동북아의 또다른 강국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기로 하고, 러시아의 베베르공사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러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해나갔다.

     

    이처럼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러시아와 밀접하게 연대해나가자, 일본은 조선정치의 정점에서 멀어져가는 소외감을 느끼게 됐다.

     

    조선과 러시아의 밀월관계가 더욱 강화되어 나가자, 일본은 명성황후가 자신들을 고의적으로 배제한다고 판단했고,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에 가장 큰 방해요소로 명성황후로 지목하고, 그녀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러니까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킨 표면적인 이유는 명성황후의 친러시아정책이라고 할 수 있고, 보다 더 큰 근본이유는 조선을 침탈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명성황후가 러시아등 강대국들을 끌어들여서,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1895108일 일본은 일본낭인들을 동원해서 경복궁에 난입해들어가서, 건청궁에 있는 명성황후를 칼로 시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불로 화형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당시 조선에 파견온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진두지휘했던 사건이었다. 육군대령 출신인 미우라는 원래 정치인출신이 아니라,

    일본군에서도 강경파에 속하는 우직한 성격의 군인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아주 적합한 인물로 낙점받았다.

     

     

    그리고 미우라 공사에게 지휘를 내렸던 인물은 바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였고, ,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정부가 기획해서 지시를 내린 사건으로, 조선에 있는 미우라 공사의 진두지휘를 받았던 40명의 일본낭인들이 실행에 옮겼던 사건이다.

     

    1895108일 새벽 5시경, 일본공사 미우라가 경복궁 앞에서 진두지휘한 상태에서, 일본군 2개 대대가 경복궁의 두 개 대문을 공격했다.

     

    당시 경복궁을 수비하던 조선의 수비병들은 갑자기 쳐들어온 일본군대의 공격을 방어해내지 못하고 패퇴하였고, 15분만에 성문이 열리게 된다.

    당시 일본군과 내통했던 조선의 일부 시위대는 싸우지도 않고 일본군 침입을 묵인했다는 설도 있다.

     

    그렇지만 홍계훈 경비대장 같은 수비군들은 일본낭인들의 침입을 막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서 전사했다고 한다.

     

    경복궁의 궐문을 열고 조선수비대 군사들을 물리친 일본낭인들 40여명이 궁궐안으로 침투해 들어갔으며,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의 옥호루로 가서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된다.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의 옥호루

     

    40명의 일본낭인들이 건청궁의 옥호루에 쳐들어가서 명성황후를 찾았지만, 궁녀복으로 변장을 한 명성황후를 찾지 못하게 되자, 궁녀 두명을 옥후루 밖으로 던져 죽이자, 이것을 본 명성황후가 복도로 달려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달아나는 명성황후를 뒤따라왔던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넘어뜨리고 발로 짓밟고 난후, 일본도로 복부와과 옆구리를 세 번 찔러서 살해했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후, 일본낭인들은 그녀의 시신을 건청궁의 동쪽 바깥으로 끌어내서 휘발유를 끼얹고 화형시켜 버렸다고 한다. 이때가 명성황후의 나이 45세로 아직 젊고 창창한 나이였다.

     

    궁궐에 난입했던 일본낭인들은 고종의 처소에도 침입하여, 고종을 압박하여 명성황후의 폐비조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거부하는 고종의 옷자락을 찟어버리고, 세자에게도 칼을 휘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살해한 후에 일본은 처음에는 일본의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명성황후를 살해했던 일본낭인들에게 조선훈련대의 복장을 입히고 침투시켰기 때문에, 일본은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조선훈련대가 공모해서 살해했다는 거짓된 변명으로 일관했다.

     

    실제로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계획을 세운 후에, 일본공사관에서 대원군을 회유해서 포섭했다고 한다.

    일본공사관은 나라를 좀먹는 명성황후를 없애고난 후에, 대원군을 다시 국정의 최고책임자의 자리로 복귀시켜주겠다는 말로 대원군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여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과연 대원군이 자신의 의지로 명성황후 시해하는 일에 가담했을까? 절대로 아닐 것이다.

     

    당시 이미 권력의 정점에서 멀어져서 힘이 전혀 없었던 대원군은 일본공사관의 협박과 회유에 못이겨서, 어쩔 수 없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름을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 어떤 시아버지가 다 늙은 나이에 무슨 덕을 보려고, 며느리를 죽이고 아들의 권력을 빼앗으려고 하겠는가?

     

    아뭏튼 1895년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일본낭인들의 칼부림을 맞고, 처참하게 척살당했다. 일설에는 명성황후를 죽이고 난후, 일본낭인들이 명성황후의 죽은 시신에 윤간을 했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일본의 '에조 보고서'를 보면, 일본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집단으로 윤간과 시간을 자행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명성황후가 죽고 난 후에, 일본은 더욱 득의양양해져서 친일파 김홍집내각을 이용해서, 일본에 유리하도록 체제를 바꾸는 을미개혁을 단행하고, 고종은 완전 허수아비왕으로 전락하고 만다.

     

    일본인고문들이 조선 조정의 모든 부서에 배치되어서, 일본의 조선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조종을 받은 김홍집내각은 고종을 압박해서 죽은 명성황후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시키는 조치를 실시한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난 후에, 친일파들을 내세워서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강등시킴으로써 명성황후를 두 번 죽이는 만행을 자행한다.

     

    이같은 부당한 조치에 세자가 나서서 황후 페위조치를 거둬달라고 강력히 반발하자, 고종은 명성황후를 후궁격인 빈으로 다시 승격시켜주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죽이는 잔학스러운 행동을 하자,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되어 나간다.

     

    일본은 처음에는 명성황후를 죽인 것이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발뺌을 했지만, 베베르 러시아공사가 증인들을 찾아내는 등 치밀한 조사활동을 벌여서, 일본공사가 명성황후의 시해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러시아를 비롯한 프랑스, 독일 등 열강들이 강력하게 일본에 항의를 하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명성황후를 살해했던 미우라공사 등 일본낭인들을 일본의 히로시마법정에 세워서 재판을 진행했다.

     

    그렇지만 이 히로시마재판은 서구 열강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실시한 형식적인 재판에 불과했고, 구속되었던 40명의 낭인들은 사건이 잠잠해진 1년 뒤에 모두 다 석방되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일본낭인들은 자신들이 조선의 왕비를 살해했다고 술자리에서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낭인들

     

    한나라의 왕비를 처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에 대해서 엄청난 분노감이 치밀어 오른다. 다시는 이같은 치욕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교훈을 절대로 잊지말아야 한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언제든지 주변국가들은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는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강할 때만이 국가의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것이고, 평화도 확보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라의 주권과 평화는 강한 국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명성황후의 초상화와 사진

     

    814일날 종로구 다보성갤러리는 광복 72주년을 맞아 전개한 특별전시회에서 () 명성황후 초상을 공개했다.

    다보성갤러리는 이날 명성황후의 새로운 초상화를 공개한 것인데, 이 초상화는 명성황후가 평상복을 입고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큰 주목을 끌었다.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이 새롭게 소개한 명성황후 초상화

     

    이번에 공개한 명성황후의 초상화는 명성황후가 두손을 모은 상태로 의자에 앉은 체 하얀빛깔의 평상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고, 머리에는 하얀 두건을 쓰고 있다.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은 이 명성황후 초상화는 운현궁에서 출토된 것으로, 여러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자신에게 들어왔다고 그 출처를 밝혔다.

     

    현재 이 초상화 뒷면에는 부인초상이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는데, 원래 부인초상위쪽에 閔氏(민씨)’라는 글씨가 있었다가 지워졌다고 한다.

     

    김관장은 원래 명성황후를 뜻하는 閔氏(민씨)’라는 글자가 있었었다는 점과 이 여인이 고급 가죽신발을 신고있다는 점,

    이승만 전대통령이 집필했던 책 독립정신의 명성황후의 사진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서 이 초상화가 명성황후의 실제 초상화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은 이 초상화가 명성황후의 초상화일 것으로 거의 확신하고 있지만, 이 초상화를 본 일부 교수들은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초상화의 옷차림이나 용모가 왕비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초라하다는 것을 들어서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아닐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 이 그림이 명성황후의 초상화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과연 이 초상화가 명성황후의 진짜 초상화인지는 우리학계에서 보다 면밀한 조사를 벌여야 판별이 날 것 같다.

    아직은 김관장의 말만 듣고서 이 그림을 명성황후의 진짜 초상화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과거부터 명성황후의 초상화는 여러장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아래 첫번째 사진은 대한제국 멸망사에 나왔던 명성황후 사진으로서 가장 일반에 많이 알려져왔던 명성황후 사진이다. 그렇지만 이 사진은 1890년대 초반부터 민간에 궁녀의 사진으로 나돌았던 사진이라고 해서, 명성황후의 실제 사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두 번째로 아래사진은 외국에 살해당한 왕비라는 제목으로 나돌았던 사진으로서,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알려졌었는데,

    이 사진이 1894년 발간된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그냥 궁녀의 사진으로 소개되고 있어서, 이 사진 역시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아래 사진은 이승만이 집필했던 책 독립정신에 수록된 사진으로 사진의 주인공을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직접 지목되었던 사진이라고 한다.

    이 사진은 일제시대때부터 1980년도까지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소개되었던 사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진도 실제 명성황후 시절에 궁궐에서 일했던 궁녀출신 여성들에게 문의해본 결과, 실제 명성황후와 다른 사람이라는 답변을 얻었다고 한다.

     

     

    결국 우리에게 여태까지 알려진 명성황후의 세가지의 사진은 모두 실제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이 전시한 명성황후 그림이 혹시 진짜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아닐까 하는 더 큰 기대감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김관장도 이그림을 자신에게 건네준 그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어서 아직 진정한 명성황후의 초상화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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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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