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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5.12 사도세자의 악행과 뒤주에서 죽은이유, 화완옹주

목차

    사도세자 이선 사망이유, 여동생 화완옹주와의 관계, 아들 정조

     

    사도세자 이선 1735213~ 1762712

     

    사도세자 이선은 우리 조선왕조에서 가장 불행한 왕실역사의 주인공이다.

    사도세자는 한창 혈기왕성한 28세의 나이에 왕이 되어보지도 못한 채, 뒤주에 갇혀 죽음으로써 한많은 세상과 하직한 불행한 세자였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가설들이 난무하고 있는데, 그가 자신의 왕위를 계승해보지도 못한 채

    너무도 젊은 나이에 자신의 친아버지로부터 죽음을 당한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고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역사상 현명한 군주라고 찬사를 받고있는 영조가 자신의 친아들인 사도세자를 그렇게 처참하게 죽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도세자는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대신들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사도세자가 여러가지 악행을 저질렀고 그에 대한 처벌로서 죽음을 당하고만 것일까?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 죽음의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파헤쳐보도록 하겠다.

     

    일각의 주장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원래 총명한 세자였는데,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훈육과 노론대신들의 모함과 음모에 의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말이 제기되고 있다.

     

    결국 사도세자는 죽을만한 큰 잘못이 없는데, 정적들의 모함에 의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주장인데, 과연 이러한 주장이 사실일까? 정말로 사도세자 자신에게는 그만한 잘못이 없었을까?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살펴보면,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한 것은 사도세자 자신의 악행이 큰 이유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당시 정권실세였던 노론들의 모함에 의해서 죽었다는 것은 사실과 좀 거리가 있는 듯하다.

     

    영조는 노론의 도움을 받아서, 제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아들인 사도세자가 노론을 무시하고 소론과 손을 잡았으며, 이에 정치적 위기의식을 느꼈던 노론세력이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하고

    사도세자의 비행을 부각시켜서, 사도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하는 것이 음모론이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되어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과 노론의 음모가 주된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사도세자가 노론의 미움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세자 자신의 광기에 의한 많은 악행이 없었다면, 사도세자가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무려 11년 동안이나 왕의 업무를 대리청정시킨 것을 보더라도, 영조는 사도세자로 하여금 다음 보위를 있게하고자 하는 뜻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어려서부터 엄격한 조기교육과 지나친 훈육을 시켰기 때문에, 이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사도세자가 삐뚤어진 성격이 형성되었고, 잘못된 길로 가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조 자신이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아들 만큼은 완벽하게 키우고자 하는 완벽증 때문에, 사도세자를 너무 엄격하게 훈육한 것이 사도세자의 반발을 불러왔고,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를 벌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 영조가 사도세자를 어렸을 때부터 세자로 책봉하고, 어린 사도세자에게 다소 엄격하게 세자교육과 훈육을 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모든 세자들이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조기교육과 훈육을 받았었기 때문에, 이것은 사도세자만의 문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아주 어린 나이에 영조의 엄격한 교육과 훈육 때문에, 성격이 삐뚤어졌다는 주장은 너무 침소봉대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논리라면, 어린 시절 엄격한 세자훈육을 받았던 조선시대의 모든 국왕들이 사도세자처럼 성격이 삐뚤어지고, 광기를 부려야 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궁궐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파렴치한 기행을 한 사람은 사도세자와 연산군 두사람 밖에 없다.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바로 사도세자 자신의 악행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세자로 있는 동안 수많은 궁녀들과 궁인들을 죽였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무고한 궁안의 사람들을 살육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사도세자의 광기어린 살육행위 때문에,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 여동생 화완옹주, 모친인 영빈 이씨마저도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살육행위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을 만한 한계점에 이르자, 아버지인 영조는 왕실의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연쇄살인범인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게된 것이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나중에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헌경왕후)가 썼던 책이 있는데, 바로 한중록이라는 책이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책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가 생전에 행한 많은 비행과 악행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사도세자가 세자 시절에 궁궐에서 수많은 내시들와 궁녀들을 죽였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죽인 궁인과 내시들의 숫자는 무려 100명에 이른다고 하며, 심지어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까지 죽였다고 하며, 마음에 안드는 궁녀를 불에 달궤서 벌을 주는 악행까지 범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책 한중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도세자는 청소년시절부터 광기에 의한 광증이 나타났으며, 나이를 먹으면서 이러한 광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심한 정신불안증세, 충동조절장애, 정신분열증세까지 겪고 있었다고 하며, 특별한 이유도 없이 홧기가 치솟아 오르면서, 그것이 심한 폭력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증세를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광증(狂症)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광증이 심해져서 주위에 있는 궁녀들이나 내시들을 이유없이 구타하고 죽였다고 한다.

     

    17611월 사도세자는 자신의 총애하는 후궁인 경빈 박씨에게 폭력을 휘둘러서 죽였다고 한다.

     

    또한 사도세자는 자신과 경빈 박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1살배기 은전군을 칼로 찌른 후 연못에 던져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버지가 첩실과 친아들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죽였다는 이 기가 막힌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포악하고 잔인한 사도세자의 악행은 혜경궁 홍씨가 지적한대로 그의 광증가학증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사도세자가 겪고있는 광증은 자신의 분노나 광기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고, ‘가학증은 아무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행위이다.

     

    사도세자의 광증이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시강원에서 세자교육을 담당하는 자신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스승에게 공격까지 했으며, 자신의 부인이자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까지도 공격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자신의 친여동생인 화완옹주도 죽이려고 시도했으나, 나인들의 만류로 실패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도세자의 악행과 비행들은 그가 세자라는 이유로, 주위사람들이 쉬쉬하면서, 오랫동안 영조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비밀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도 사도세자의 이런 비행들을 영조에게 알려지지 않게끔 한동안 비밀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사도세자의 악행과 비행이 계속되자, 17626월 대신 나경언이 영조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영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여태까지 저질렀던 사도세자의 비행들이 모두 영조에게 전달되었는데, 사도세자의 악행에 대한 상소를 올린 나경언은 영조의 분노를 사서 처형되었지만

    이로써 그동안 사도세자가 저질러왔던 수많은 악행들을 영조가 모두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사도세자의 운명이 뒤바뀔만한 결정적인 한방이 터지게 된다.

    같은 해인 1762년 사도세자의 친어머니인 영빈 이씨가 너무도 광폭하게 변한 사도세자를 처분할 것을 영조에게 고변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친어머니가 자신의 친아들을 죽이라고 남편인 왕에게 고변하는 경천동지할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친어머니인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가 너무도 광폭해져서 수많은 궁인들을 살육해왔는데, 혹시라고 세손이나 세자빈이 다칠까봐 염려되고, 심지어 부왕인 영조를 암살하려고 한다며, 영조에게 자신의 아들을 처분(사사)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당시 영조가 사도세자를 처분할 때 내렸던 반포문의 교지에는 영빈 이씨가 고변한 내용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물에서, 영빈 이씨의 주장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무고한 궁녀, 내시, 나인들 100명을 죽였으며, 이유도 없이 궁인들에게 불로 지지는 징벌을 수도 없이 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도세자는 자신에게 아첨하는 내수사관원들에게는 재물을 나눠주어서 자신에게 충성하게 만들었고, 몰래 밖으로 월담해서 밤낮으로 많은 기생들이나 비구니들과 음란한 행동을 벌였다고 한다.

     

    더욱이 궁궐후원에다 이상한 무덤을 만들고 기이한 의식도 치렀다고 하며, 불측한 짓과 흉측한 짓거리를 많이 행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으로 '폐세자 반교문'에 기록된 내용

     

    또한 사도세자는 어머니인 영빈 이씨도 죽이려고 했을 뿐만아니라 심지어 아버지인 영조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자, 생모인 영빈 이씨는 더 이상의 살상을 막기 위해서,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처분을 요청했던 것이다.

     

    사도세제의 친모인 영빈 이씨는 그동안 사도세자가 저질러온 수많은 비행과 악행을 알고있었지만, 모자지간의 정 때문에 비밀로 유지해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도세자의 악행이 날로 더해지고, 심지어 국왕(영조)까지 죽이려고 시도를 하자, 영조의 안위를 위해서 사도세자의 처분을 고변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친어머니가 자신의 친아들을 처분해줄 것을 왕에게 부탁했겠는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사도세자가 아버지인 영조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칼을 들고 영조가 있던 궁궐로 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할 때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에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로부터 사도세자의 역모 가능성을 전해듣고, 사도세자를 폐위시키고 뒤주에 가뒀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결정적인 이유는 항간에 나도는 것처럼 노론파의 음모 때문이 아니라, 바로 세자가 추구한 역모 때문인 것이다.

     

    친모인 영빈 이씨는 자신의 상소문에서 아들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들의 수가 100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친모가 자신의 친아들의 비행들을 거짓말로 꾸밀 수는 결코 없다고 본다.

     

    그동안 사도세자의 비행을 부분적으로 전해듣고 있던 영조는 긴가민가 하는 상태였지만, 사도세자의 모후인 영빈 이씨의 고변을 전해듣고는 사도세자의 모든 비행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않아도 사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영조는 영빈 이씨의 고변으로 아들 사도세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176274, 영조는 사도세자를 친국장에 세우고, 그의 세자직위를 박탈했으며, 그를 쌀을 보관하는 뒤주에 가두게 했다.

     

    원래 처음에는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칼을 줘서 자결을 명했는데, 사도세자가 실패하자 밧줄을 줘서 자결토록 했지만, 사도세자가 계속 자결하지 않자, 커다란 뒤주를 갖고오게 했고, 그 뒤주 속에 세자를 집어넣고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고 한다.


     

    이렇게 사도세자가 뒤주속에 갇혀있었는데, 누군가가 와서 사도세자에게 몰래 물과 죽을 줘서, 사도세자는 사흘이 지나도록 죽지 않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영조는 뒤주의 틈이나 구멍을 유약을 발라서 모두 막아버리게 했고, 결국 8일이 지난 후에, 사도세자는 아사하고 만다.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는 그동안 수많은 살육을 저지르고 역모까지 추진한 사도세자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을 것이고, 자신과 왕실사람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다.

     

    혹자는 영조를 비정한 아버지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궁궐에서 수많은 살육을 저지르고 자신에게도 칼을 겨누고있는 사도세자를 제거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영조의 사도세자 제거는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으며, 사도세자를 당쟁의 희생물이라고 보는 것은 침소봉대한 측면이 있다.

      

    영조는 비록 사도세자가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대를 이을 세손을 낳은 세자였고,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응징으로서 처참한 처형을 택하지 않고, 뒤주 속에 가둬서 죽였던 것이다.


     

    사도세자가 수많은 궁인들과 후궁을 죽인 사실은 영조가 반포한 반포문과 영빈 이씨의 상소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그리고 영조의 언행을 기록한 실록 등에 명백히 기록으로 나와 있다.

     이러한 기록물들에 나와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행한 수많은 악행들을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사도세자는 자신의 친모인 영빈 이씨와 부인인 혜경궁 홍씨도 죽이려고 했고, 아버지인 영조마저도 죽이려고 했는데, 그의 광폭한 악행은 더이상 묵과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섰다고 봐야 한다.

     

    아버지인 영조로서도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존립까지도 위험에 빠뜨릴 아들 사도세자의 이같은 악행을 더이상 두고만 볼 수 없었을 것이며, 아버지 영조의 사도세자 죽임은 불기피했던 일이었다고 본다. 비록 불행한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

     

    그리고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주장은 너무도 황당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세자의 악행과 비행이 점점 도를 넘어버리고,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곁에서 이같은 사도세자의 비행을 모두 알고있던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은 더이상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사도세자의 악행을 묵인만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지, 적극적으로 사도세자를 죽이려고 고변하거나 모의한 것은 아니다.


     

    사도세자의 친어머니의 고변처럼 사도세자가 100명의 궁인들을 죽였는데고 불구하고, 그것을 묵과한 채, 사도세자가 다음 왕으로 올라서게 된다면, 이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세자일 때도 백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그가 절대적 권력을 가진 왕이 되면, 그보다 더 많은 살육을 벌일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흉측한 기행과 잔인한 살육을 즐기는 사도세자가 왕이 된다면, 연산군이나 네로황제보다 더 흉악한 폭군이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가 있다.

    그러한 폭군이 나온다면,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의 비극이고, 백성들의 안위에 불행한 일이 닥치게 된다.

     

    사도세자가 더이상 용인될 수 없을 정도로 광폭한 살육을 저질렀기 때문에,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 홍인한도 사도세자를 포기한 것이지, 적극적으로 그를 죽이려고 사주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등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에 관여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판단이며, 사실과는 괴리가 있는 주장이다. 


     


    화완옹주와 사도세자의 관계

     

    사도세자의 일대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다른 사람이 바로 화완옹주이다. 화완옹주는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 태어난 막내딸이며, 영조로부터 큰 총애를 받았던 공주다. 따라서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친여동생이며, 정조의 고모이기도 하다.

     

    화완옹주는 12세 때에 영의정의 아들인 정치달에게 시집을 갔지만, 20세 때에 남편과 딸과 모두 사별하고, 청상과부가 된 인물이다.

    화완옹주를 끔찍이도 총애했던 아버지 영조는 홀몸이 된 화완옹주를 궁궐에서 살게 했다.


      

    그런데 궁궐로 돌아온 화완옹주는 오빠 사도세자와 사이가 안좋았으며,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화완옹주는 오빠 사도세자의 나쁜 악행과 비행들을 아버지인 영조에게 고해바쳤다고 하며, 이로 인해 화완옹주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벌어졌다고 한다.

     

    한 예로 인원왕후의 상이 났을 때에, 사도세자는 인원왕후전의 궁녀인 빙애를 범하는 비행을 저질렀고, 그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취했다고 한다.

    그런데 상중에 여인을 취하는 행동은 왕실의 법도를 위반한 금기사항이었고, 더욱이 상전에서 일하는 나인을 취하는 것도 있어서는 안될 금기사항이었다.

     

    사도세자의 이런 비행이 영조에게도 알려져서, 영조로부터 엄한 추궁을 당했는데, 사도세자는 자신이 취했던 빙애를 화완옹주의 처소에 몰래 숨겨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화완옹주가 이같은 사실을 아버지인 영조에게 고해바쳤고, 사도세자는 영조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게 된다.



    이것은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화완옹주가 사도세자의 정적으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화완옹주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 그녀가 아버지인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사도세자의 온갖 악행을 어머니인 영빈 이씨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영조에게 직언하기가 곤란했던 측면이 있고, 화완옹주가 영조에게 친오빠의 비행을 알리는 역할을 대신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화완옹주는 막내라서 그런지 애교도 많고, 아버지에게 예쁜 짓을 많이 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화완옹주가 궁궐에서 아버지인 영조의 총애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영조에게 고변을 쉽게 할 수 있는 위치였다고 보여진다.

     

    화완옹주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변했던 것은, 화완옹주가 사도세자를 모함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할만한 위치나 권력이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화완옹주가 사도세자와 대립관계에 있던 노론과 한통속이 되어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같은 주장은 역사기록에 근거가 없는 과장된 추측에 불과하다.


      

    사도세자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사도세자가 스스로 만들어냈던 자신의 악행 때문이다.

     

    화완옹주는 20살의 젊은나이에 남편 정치달과 하나뿐인 딸이 일찍 죽어서 외로운 청상과부가 되어버리자, 딸을 극진히 사랑하였던 아버지 영조는 화완옹주를 궁궐로 불러들였으며, 화완옹주는 영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면서 궁궐에서 살게 된다.

     

    그런데 궁궐에서 살게된 화완옹주가 아버지인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 해버리고, 사도세자는 영조로부터 심한 홀대를 받게 되자, 사도사제는 화완옹주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화완옹주 또한 못된 비행들을 일삼는 오빠 사도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후에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과 화완옹주와의 사이에도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세손으로 있던 시절에,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하라는 교지를 내렸는데, 화완옹주의 양아들인 정후겸이 홍인한과 함께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화완옹주도 영조에게 아버지는 아직도 정정하신데, 세손에게 내린 대리청청을 거두어주십시오라고 고변을 했다.


     

    이것을 두고서 일부사람들은 마치 화완옹주와 정후겸 모자가 세손(정조)의 왕위계승을 반대하고, 방해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데 화완옹주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인 영조가 계속 정사를 돌보시길 권하는 것은 어쩌면 자식으로서의 도리라고 할 수도 있다.

    딸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계속 정정하게 정사를 돌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은 부녀지간의 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세손(정조)으로서는 화완옹주의 이러한 태도가 자신의 왕위등극을 반대하는 공작으로 의심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 당시는 세손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노론대신들의 견제가 상당히 심했으며, 홍인한 같은 대신들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결국 영조의 총애를 크게 받았던 세손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22대 조선왕(정조)으로 등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과거 화완옹주와 양아들 정후겸이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아들 정후겸은 정조로부터 탄핵을 받는 처지로 전락한다.

     

    왕으로 등극한 정조는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했는데, 자신의 왕위등극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홍인한을 사사했고, 점후겸 또한 사사했으며, 화완옹주도 자신의 왕위등극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옹주지위를 박탈하고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다.

     

    영조의 큰 총애를 받아서 궁궐에서 큰 세도가로 권세를 누렸던 화완옹주는 영조의 죽음으로 권세를 모두 잃고, 강화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화완옹주가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정치적인 숙청을 당하고만 것이다. 

     

    그런데 1799년 어쩐일인지 정조는 즉위 23년이 되던 해에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화완옹주의 죄를 사면해주었다.

     

    정조로부터 처벌을 받고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화완옹주는, 23년이 지난 후 62세의 나이에 사면이 되었고, 다시 궁궐로 들어와서 살 수 있게 됐다.

    정조가 자신과 정적이나 다름없었던 화완옹주를 뒤늦게나마 사면해준 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등 가족간의 골육상쟁을 더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화완옹주가 자신의 아버지와는 대립관계에 있었고, 비록 자신과도 정적관계에 있었지만, 그래도 화완옹주는 어렸을 적에 자신을 귀여워해주고, 돌보아줬던 따뜻한 친고모였다

    남편과 자식이 없었던 화완옹주는 궁궐로 들어온 후, 세손(정조)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극진히 아껴주고, 친자식처럼 돌보아주었다고 한다.


    오히려 화완옹주는 세손(정조)에게 너무도 심하게 집착하는 모습까지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화완옹주가 세손(정조)이 어렸을 때에는 끔찍하게 위해주었지만,

    아버지인 영조의 대리청정 문제로 인해, 두사람 사이에는 차가운 냉기류가 흐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화완옹주가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은 반대했지만, 그의 왕위계승을 방해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화완옹주가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기는 했지만, 정조의 왕위계승을 방해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

    아뭏튼 정조는 화완옹주와 정치적으로는 다른 입장에 있었지만, 친고모를 처벌했다는 후대의 나쁜 평가를 받고싶지 않았던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에, 화완옹주를 사면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1808517일 순조실록에는 화완옹주가 죽어서 더이상 죄를 묻지않는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화완옹주는 사면된 후 9년이 지난 71세에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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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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