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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23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의 악행과 남성편력, 초상화

목차

    고종의 비, 중국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악행과 남총

     

    중국역사상 가장 잔혹한 황실역사를 만든 주인공이자, 희대의 악녀로 악명이 높은 여인이 바로 측천무후다.

    측천무후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여황제에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그 잔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던 악녀라고 할 수 있다.

     

    여태후, 서태후와 함께 중국의 3대악녀 중 한사람으로 알려진 측천무후의 잔인성을 세여자 중 최고라고 할 만큼, 정말 대단한 잔악스러움을 지닌 여황제였다.

     

    여태후와 서태후도 희대의 악행을 많이 범했는데도 자기 자식만큼은 죽이지는 않았지만, 오직 측천무후만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과 딸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그 결과 당나라 최고의 권력인 여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중국의 3대악녀 중 최고의 악녀로 손꼽히는 측천무후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생을 안정시켰다는 나름대로의 업적도 갖고 있는 상반된 두가지의 얼굴도 갖고있는 그녀다.

     

     

    중국역사상 가장 잔악하고 음탕한 요부라는 평가와 함께,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던 여걸이라는 두가지 평가를 함께 받고있는 측천무후는 두얼굴을 지닌 악녀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측천무후는 황위를 찬탈해서 여황제로 등극하고 난 후에, 수많은 남총을 끌여들여서 무안우치의 향락을 즐겼으며, 자신의 하룻밤 쾌락을 위해서 많은 젊은남자들을 희생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천일야사' 방송에서도 측천무후의 잔혹스러운 일대기를 소개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알면 알수록 경악과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희대의 요부 측천무후가 어떤 여성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측천무후의 원래 이름은 무조인데, 무조는 63614살의 나이로 궁궐에 입궁해서 당나라 태종의 시기에 궁녀가 되어 일했다고 한다.

    어느날 당태종이 자신이 다루지 못하는 성질이 거친 말을 어떻게 길들일지를 묻자, 당돌하게도 앞으로 나선 무조(측천무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궁녀의 신분으로서 당돌하게도 당태종 앞에 나선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에게 쇠채찍, 쇠망치, 비수 세가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거친말을 길들일 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는 말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쇠채찍으로 때려서 말을 듣게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쇠망치로 때리고,

    그래도 말을 안듣는다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말이니, 비수로 찔러 죽여버리는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측천무후 초상화

     

    이렇게 명쾌하게 답변한 무조(측천무후)를 보고, 당태종은 크게 만족해하면서, 그녀를 후궁으로 삼고자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늘의 별자리를 살펴서 나라의 운세를 점치는 태사령이 무조(측천무후)를 본 결과, 그녀에게서 역상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을 감지했다고 한다.

     

    태사령은 당나라황제 태종에게 무조(측천무후)를 후궁으로 삼을 경우에는, 장차 무씨에 의해서 역모가 일어나서 후손들이 큰해를 당하고, 황실의 대가 끊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말을 들은 당태종은 그이후로 한번도 무조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하며, 그녀에게 황실의 서가를 관리하는 직책을 주어서 일하게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미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던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의 매혹적인 용모를 내세워서, 태종 뿐만아니라 고종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허지만 무조는 끝내 태종의 성은을 입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엄청나게 강했던 무조(측천무후)는 온갖 간교와 권모술수를 다 부려서,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황후의 자리뿐만 아니라, 여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대단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온갖 간교를 다 부렸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는 당태종에게는 성은을 입지는 못했지만, 그 아들 고종으로부터 성은을 입었고, 후궁에서 황후자리까지 올라섰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아들을 죽이고 여황제에 오름으로써, 태종의 직계후손들의 씨를 말렸던 것이다.

     

    그 당시 당태종에게 말한 태사령의 예측은 나중에 그대로 적중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당태종이 고구려정벌에 실패한 후에 큰 병을 얻어서 병석에 눕게되자, 무조(측천무후)는 태종의 병간호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태종의 병문안을 왔던 고종은 무조(측천무후)의 아름다운 용모에 홀딱 반했다고 한다.

     

     

    자신의 빼어난 미모로 미래의 황제가 될 황태자(고종)를 완전히 홀린 무조(측천무후)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의 운명이 완전히 되바뀌게 된다.

     

    태종이 죽고 난 후에, 태종을 모시던 후궁이나 궁녀들은 모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어야 하는 것이 그당시의 법도이었기 때문에, 황실의 법도에 따라 무조(측천무후)도 어쩔 수 없이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무조(측천무후)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던 고종은 수시로 미행을 나가서, 절에 은거하던 무조(측천무후)를 만나 사통을 나눴다고 한다.

     

    무조의 미색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절에서 비구니로 지내던 그녀를 황제가 몰래 찾아와서 사통까지 나누었을까?

    고종의 이같은 밀행은 나중에 자신의 아들들을 희생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될 것을 그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몇 년 동안 비구니로 지내던 무조(측천무후)가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고종의 정비인 왕황후는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소숙비 때문에, 독수공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궁궐에서 고종을 사이에 두고, 정비인 왕황후와 소숙비 사이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왕황후는 소숙비를 견제를 하기 위해서, 고종이 마음에 두고있는 무조를 전격 궁궐로 불러들이게 된다. 황실의 법도에 따라서 숨어서 무조(측천무후)를 만나야만 했던 고종은 뛸 듯이 기뻐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자신의 후손들이 끊어지는 엄청난 재앙이 되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을 낳지못했던 왕황후는 소숙비의 아들이 장차 황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조(측천무후)를 궁궐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궁궐로 복귀한 무조(측천무후)는 소의의 첩지를 받고, 예상대로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고종과 소숙비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연찮게도 황후의 도움을 받고 비구니신세를 면하고, 다시 궁궐로 돌아올 수 있었던 무조(측천무후)는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야망이 워낙 컸던 무조(측천무후)는 결코 후궁으로만 만족할 수 없었다. 권모술수에 능했던 그녀는 자신의 연적인 왕황후와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 새로운 계책을 만들어낸다.

     

    무조(측천무후)는 고종의 성은을 입어서 딸(안정공주)을 하나 낳았는데, 그녀가 원했던 자식은 딸이 아닌 왕자였다고 한다. 자신이 왕자를 낳고 그 왕자를 황태자로 만들어야만, 자신이 황후가 되어서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딸을 낳은 것에 실망한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켜서, 두 연적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새로운 계책을 만들게 된다.

     

    무조(측천무후)는 아무도 몰래 자신의 딸의 목을 졸라서 숨을 끊어놓았고, 딸이 죽어있는 처소로 왕황우와 소숙비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의 초대를 받고서 그녀의 처소를 찾았던 왕황우와 소숙비는 그 방안에 안정공주가 죽어있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두 여자에게는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곧바로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의 처소로 고종을 불러들였고, 죽어있는 딸(안정공주)를 안고있던 왕황후와 소숙비는 꼼짝없이 딸의 살해범으로 의심받게 된 것이다.

    측천무후가 파놓은 함정에 왕황후와 소숙비는 빠져들었던 것인데, 측천무후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딸의 살해범으로 몰아서, 결국 두사람을 처형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어린 딸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두 연적을 모두 제거해버린 것이다.

    측천무후가 얼마나 잔악스러운지, 그리고 얼마나 권력욕심이 강한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만행은 이것이 끝이 아니며, 앞으로 더욱 많은 악행들이 그녀들 기다리고 있었다.

     

    황후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소숙비까지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한 측천무후는 그 후 여러명의 왕자들과 딸을 출산했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고 나서, 자신은 황후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무황후(측천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42녀를 낳았으며, 자신의 첫째아들을 황태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황후의 자리에 올라섰던 측천무후는 황후의 권력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권력의 맛을 옆에서 지켜봤던 그녀는 황후 그이상의 권력을 원했던 것이다.

     

    무황후(측천무후)는 고종이 정사를 펼치는 시기에도, 정사에 관여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고종이 멀쩡하게도 살아있는데도, 무황후(측천무후)는 사사건건 정사에 관여해서 전횡을 일삼았다고 한다.

     

     

    정치적 야심이 워낙 컸던 무황후(측천무후)가 필요 이상으로 정치에 개입하게 되자, 고종과 무황후(측천무후)사이에 기싸움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후 고종의 몸이 점점 쇠약해져갔고, 마침내 고종이 원인모를 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황후(측천무후)는 고종을 대신해 섭정에 나섰다고 한다.

    드디어 정사를 잡게된 무황후(측천무후)는 자신의 권력행사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고종의 외숙부인 승상 장손무기를 숙청해버리고, 그 집안을 풍비박산냈다고 한다.

     

    병을 앓고 있는 고종은 방속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고, 무황후(측천무후)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고 정사를 독단해 나갔다고 한다.

    황제 대신 용상에 앉아서 정사를 독단해나갔던 무황후(측천무후)는 권력에 완전히 심취해져갔고,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고종에게 황위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라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이제 나이도 먹고 병약해졌으니, 황태자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뒷방으로 물러나라는 요구였다. 비구니였던 자신을 총애해주고,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려준 고종에게 해서는 안될 요구를 측천무후는 거리낌 없이 했던 것이다.

     

     

    황후가 된 후에 주변사람들에게 엄청난 위세를 부리고, 기고만장해진 무황후(측천무후)의 만행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아픈 고종을 대신해서 정사를 돌봤던 무황후(측천무후)는 최고권력의 맛에 완전히 빠져버렸던 것이고, 자신이 맛본 최고의 권력을 아들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무황후(측천무후)는 황후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여황제가 될 야심을 품었던 것 같다.

     

    자신이 권력의 최고정점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길 바랬던 것이다.

    남편인 고종은 이미 병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자신의 최고권력에 방해가 될만한 인물은 아들인 황자들 뿐이었다.

     

    무황후(측천무후)는 황태자로 책봉된 자신의 첫째아들부터 먼저 제거했다. 측천무후의 첫째아들인 이홍은 황태자로 책봉되자 마자,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고 한다. 무황후(측천무후)의 첫째아들의 황태자책봉식이 있던 날, 누군가가 독을 넣은 음식을 먹고서, 곧바로 숨졌다고 한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후, 무황후(측천무후)의 둘째아들인 이현은 두번째로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어머니 무황후(측천무후)는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를 심하게 견제했다고 한다.

     

    둘째아들이자 황태자인 이현이 매우 영특했기 때문에, 이렇게 똑똑한 아들이 황제가 되면, 자신의 권력행사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던 무황후(측천무후)

    둘째아들에게 여색을 너무 밝혀 황제재목이 아니라는 말도 안되는 죄목을 붙여서, 그를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무황후(측천무후)는 유배지로 쫒겨난 둘째아들에게 사신을 보내서, 목을 메서 자살하도록 교사했으며, 결국 무황후의 둘째아들은 목을 메어 자살했다고 한다.

     

     

    자신이 최고의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친아들을 두명씩이나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패륜을 저질렀던 무황후(측천무후)는 사람의 탈을 쓴 악마나 다름 없었다.

    아무리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이렇게 천륜을 저버리고 친아들마저 죽일 수가 있을까,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두아들이 죽은 후, 무황후(측천무후)는 셋째아들인 이현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683년 고종이 사망하고 난 후에 황제의 재위를 물려받은 이현을 3개월만에 폐위시켜버리고, 자신의 말을 잘듣는 넷째아들 이단(예종)을 다시 새로운 황제로 책봉하게 된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가장 고분고분하고 말을 잘듣는 막내아들을 세로운 황제로 만들었고, 자신은 황제보다 더 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자신의 넷째아들을 허수아비황제로 전락시키고, 자신이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전권을 행사해나갔고,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만한 대신들은 역모죄를 뒤짚어 씌워서, 가차없이 처단해버렸다고 한다.

     

    주변에 자기에게 도전할 만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버리고 난 후, 690년에 측천무후는 허수아비황제였던 이단(예종)을 황제에서 폐위시켜버리고, 67세의 나이에 스스로 여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측천무후가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폐위시키고, 스스로 여황제가 되어서 새롭게 세운 나라는 주나라라고 한다.

     

     

    측천무후가 이렇게 전횡을 일삼는 동안에, 그녀의 통치에 반발하는 반란도 몇건 일어났지만, 이상하게도 하늘의 뜻이 그녀에게 있었던지, 측천무후는 반란군들을 손쉽게 토벌해버렸다고 한다.

     

    서경업의 반란과 이원가의 반란을 모조리 제압하고 난 후, 측천무후는 더 이상 방해세력이 없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통치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측천무후는 권력욕심도 강했지만, 쾌락이나 남색을 무척이나 밝혔다고 한다.

    67세의 나이에 여황제로 등극한 측천무후는 늦은 나이에도 자신의 쾌락적 본능을 여지없이 드러냈었다고 하는데, 중국 전역에서 수많은 남성들을 끌여들여서 향락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여황제가 되고 난 후에, 중국의 전역에서 젊고 잘생긴 남총들을 수천명을 모집해서 궁궐로 끌여들었으며, 밤마다 남총들을 바꿔가면서 광란의 밤을 즐겼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궁궐안 깊숙한 곳에 공학부라는 은밀한 내실을 만들었고, 이 공학부에 잘생기고 건강한 남총들을 머물게 하면서, 매일밤마다 남총들과 동침했다고 한다.

     

     

    중국 황실여성 중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섭섭할 정도로 음탕하고 호색한이었던 측천무후는 60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젊은 남총들을 불러들여 매일같이 쾌락을 즐겼다고 하는데, 만일 남총들이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목숨이 날아갔다고 한다.

     

    남총으로 뽑혔던 젊은 사내들은 공학부에 머물면서 낮에는 궁궐에서 잡일이나 심부름을 하면서 측천무후의 시중을 들었고, 밤이 되면 그녀의 잠자리상대가 되었다고 한다.

     

    당나라의 역사서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측천무후가 남총으로 뽑았던 젊은남성들의 수가 무려 3,000명이나 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측천무후는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한 남성편력을 지녔던 여성이자, 가장 음탕한 황실여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측전무후는 여색을 가장 많이 밝혔다고 평가되는 진시황제보다도 더 많은 수의 남자후궁들을 두었다고 할 수 있는데, 70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 남총들을 매일같이 상대했다고 하니, 정말 음탕하기 짝이 없는 천하의 요부라고 할 수 있다.

     

    측천무후는 만년에도 젊은 남총들에게 사로잡혀서,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자, 쿠테타가 일어났으며, 측천무후의 셋째아들이었던 중종이 쿠테타를 주도했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자신이 폐위시켰던 아들로부터 역공을 받아서, 결국 여황제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만다.

    705년경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측천무후는 15년동안 여황제로서 군림한 후에, 자신의 아들에 의해서, 폐위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무려 93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다. 희생된 사람 중에 대신들이 36명이고 왕족은 34명이며, 또한 놀랍게도 자신의 직계가족만 23명이나 된다고 한다.

     

    측천무후에게는 두가지 상반된 평가가 함께 내려지고 있는데, 하나는 국권을 튼튼히 지키고, 민생을 잘 돌보았던 여장부라는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 자식까지 살해하고, 향락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던 희대의 악녀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측천무후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서 민생을 잘 돌보았던 공적은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권력욕심에 사로잡혀서 자식들까지 희생시키고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업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측천무후가 범한 인륜에 위배되는 잔악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이 좋아야지만 그 결과가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측천무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중국황실을 어지럽히고 살생을 일삼았던 희대의 살인마라고 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측천무후는 여황제로서 폐위된 705년도의 12월달에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생전에 그녀는 자신의 묘비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실제로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있지 않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왜 죽으면서 자신의 비석에 글자를 쓰지못하게 했던 것일가?

    혹시 측천무후가 죽는 순간에, 자신의 과거의 악행들이 떠올랐고, 죽는 순간만큼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의 비석에 글자를 새기지 말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판단해 본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는 순간에는, 가장 선한 양심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최고의 권력을 탐했던 측천무후도 죽는 순간에는, 아마 자신의 권력욕심 때문에, 희생당했던 자식들의 얼굴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아무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도 떼어놓지 못하는 것이 부모자식간의 정인데,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에, 자신의 자식들을 희생시킨 측천무후도 죽을 때 만큼은 인간의 양심을 되찾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측천무후는 인간으로서 가장 잔악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최고의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측천무후는 희대의 악녀이자, 사이코패스일 뿐이라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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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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