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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19 서태후의 악행과 남성편력, 실제얼굴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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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3대악녀 서태후의 수렴첨정과 미모아들 광서제

       

    서태후는 중국황실에서 3명의 황제가 재위하는 동안, 직접 섭정을 꾀했던 권력야욕이 컸던 태후이며,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누렸던 청나라의 태후이다.

     

    후대사람들은 서태후를 중국의 3대악녀 중 한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서태후는 역대 황실의 여성으로서 측천무후와 더불어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던 요부이자, 사악한 여장부라고 평가할 만하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자신이 직접 여황제가 되어, 무소불이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서태후는 아들과 조카를 허수아비황제로 만들고, 자신이 배후에서 수렴첨정을 하는 방식으로 무소불이의 권력을 휘둘렀던 철의 여성이었다.

      

    서태후는 두명의 허수아비황제들을 세우고그 뒤에서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둘렀는데그녀는 무려 48년 동안이나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자신의 수렴첨정을 반대하는 대신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아들의 비까지 죽였으며조카인 동치제도 거침없이 암살했던 무자비한 태후였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행사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대신이든 혈육이든 가차없이 살육했을 정도로 무자비하고 난폭한 성미를 지녔다고 한다.

     

    서태후는 엄청난 사치를 일삼아서 청나라국고를 낭비했으며, 측천무후처럼 젊고 잘생긴 수많은 남총들을 불러들여서,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기도 했다.

    권력욕구의 측면에서는 중국의 역대 왕실여인 중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정도로 엄청난 권력욕심을 갖고 있었는데, 자신의 아들 동치제와도 권력싸움까지 벌였을 정도라고 한다.

     

    서태후는 청나라 9대황제인 함풍제 때에 궁궐에 17세의 나이로 궁녀로 들어왔다고 한다. 서태후는 궁녀시절에도 워낙 야심이 큰 여인이라서, 황제인 함풍제의 눈에 들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야망을 갖고있었다고 한다.

     

    궁녀시절 서태후는 궁궐에서 고양이를 잃어 슬피우는 연기를 펼쳐서, 황제인 함풍제의 눈에 들게 되었고, 후궁으로 책봉되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혹은 서태후의 목소리가 워낙 꾀꼬리처럼 곱고 노래를 잘해서, 함풍제가 지나가던 길목에서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함풍제의 눈에 들어서 황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서태후 실제 사진


    서태후는 궁녀시절에도 미모가 뛰어났고 목소리도 좋았기 때문에, 황제의 성은을 입고 후궁에 책봉될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서태후가 운이 무지하게 좋았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의 여인들 중 유일하게 그녀가 아들을 출산했기 때문이다.

     

    1856년 서태후는 함풍제의 성은을 입고 황제(함풍제)의 첫번째 아들(동치제)을 낳게 된다. 아들이 전혀 없었던 함풍제에게 첫아들을 낳아준 서태후는 의귀비에 책봉되지만, 유일한 황태자를 낳아주었기에 사실상 황후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서태후가 황자를 낳았을 당시에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가 있었는데, 황제의 후궁에 불과했던 서태후는 아들을 낳고 기세가 등등해져, 나중에 동태후와 권력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여나가게 된다.


      

    황자를 낳은 후 함풍제가 서태후의 처소를 자주 찾지않게 되자, 서태후는 함풍제의 총애를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자신의 외모를 최고의 미모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는고 하는데, 새똥으로 만든 옥욕산으로 세수를 했고, 피부를 곱게 만들기 위해서, 매일같이 진주를 갈아 마셨다고 한다.

     

    또한 서태후는 매일같이 두명의 산모를 불러다가, 그 산모들이 공급하는 신선한 모유를 하루 한잔씩 마셨다고 한다.

     

    서태후는 황자를 낳은 이후부터 서서히 그녀의 숨겨져왔던 정치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영국 등 구미열강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범하던시기였고,

    러시아가 청나라 북변의 땅을 전격적으로 정복해버리자, 함풍제는 화병이 들어서 병석에 드러눕게 된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와병을 기회로 삼았는데, 황제의 허락을 받아서 자신이 대리청정을 맡아 정사를 대신 돌보았다고 한다.

    황자를 낳고서 기세가 등등했던 서태후는 정치에까지 관심을 갖고 병석에 누운 함풍제를 대신해서 국사를 주물럭거리게 되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으로 사망하자, 서태후의 아들은 고작 6살의 어린나이에 황제(동치제)의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6살의 어린 황제(동치제)가 황위를 계승하게 되자, 모후인 서태후는 권력의 야욕을 숨기지않고, 어린 황제를 대신해서 본격적으로 섭정을 펼쳐나가게 된다.

      

    이 당시 죽은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함풍제의 후궁이자 동치제의 모후인 서태후가 청나라조정의 권력을 서로 양분하고 있었다.

    서열에서는 정비출신인 동태후가 위였으나, 유일한 황자를 출산한 서태후가 실권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서태후는 황제의 모후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이제 함풍제가 죽은 황실에서는, 자신보다 더 윗전인 사람은 동태후 한사람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동태후는 단지 서태후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감이었다.


     

    그렇지만 서태후에게는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함풍제가 죽기 직전에 서태후의 권력의 야심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죽은 후에 서태후가 권력을 농단하려고 한다면, 그녀를 죽이라는 유서를 남겨놓았다고 한다.

    서태후의 권력욕구가 얼마나 컸었기에, 함풍제조차도 그녀의 권력전횡을 죽으면서까지 문제 삼고 견제하였을까?

     

    그 함풍제의 유서를 갖고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동태후였으며, 동태후가 서태후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견제장치였던 것이다.

     

    아들 동치제가 17살이 되던 때까지 섭정을 해왔던 서태후는 동치제가 17살이 넘은 후에도 계속 정무에 관여했고, 동치제의 국정수행에도 사사건건 간섭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태후는 아들이 장성해서 성인이 된 뒤에도 권력을 아들에게 넘기려하지 않고, 계속 손아귀에 쥐고 있으려고 했다.

    아들(동치제)가 장성한 이후에도 권력을 놓지않으려고 했던 서태후와 아들 동치제간의 권력을 놓고 서로 심한 마찰까지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서태후와 아들 동치제간의 권력을 놓고 알력이 생기자, 동태후가 그 틈을 비집고 동치제와 긴밀하고 가까운 관계를 형성해갔다고 한다.

     

     

     

    권력의 정점에서 서태후와 대립관계였던 동태후가 오히려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와 더욱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함풍제의 제사를 지내러 가던 날에 동태후와 서태후간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황실사람들과 조정백관이 함께 함풍제릉에 제사를 지내러 가던 날에 서태후가 동태후와 나란히 걸어가자, 동태후가 서태후를 조정백관이 보는 앞에서 크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후궁출신인 서태후가 제1황후인 동태후와 나란히 걸을 수 없다고 여긴 동태후가 서태후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호통을 쳤고, 많은 조정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톡톡히 당한 서태후는 동태후에게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고 한다.

    동태후는 황후출신이지만 서태후는 후궁출신이기 때문에, 서로간에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서태후는 잔꾀를 부려서 동태후의 환심을 사고 그녀를 감동시킨 뒤에, 자신을 처단할 수 있는 위임장인 그 유서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동태후가 감기에 걸려 며칠간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서태후가 보낸 약을 먹고 난 후 동태후는 감기가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서태후는 팔에 붕대를 감고, 동태후를 찾아가서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내고, 그 피를 섞어서 만든 감기약이 효험을 보아서 동태후가 감기에서 낫게됐다고 거짓고변을 했고, 그 말에 감동을 받았던 순진한 동태후는 함풍제의 유서를 꺼내어서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언제든지 서태후가 권력을 농단하고 왕실을 어지럽히면, 그녀를 죽여도 좋다는 함풍제의 유서는 서태후의 잔꾀로 인해서 불살라 없어지고 말았다.

     

    자신을 옥죄었던 함풍제의 유서가 사라지게 되자, 서태후는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어졌고, 동태후에 대한 태도는 바로 돌변하게 되었고, 며칠 후에 동태후는 서태후가 보낸 전병을 먹고난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동태후가 없어진 후에, 서태후는 본격적인 야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황제의 머리위에 올라서서 국가정사를 제멋대로 주물렀으며, 온갖 전횡을 일삼으면서 갖은 횡포를 다 부리게 된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행사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충신들을 가차없이 죽였는데, 재원, 단화, 숙순 같은 고명대신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해버렸다.

     

    서태후는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의 정비인 황후가 못마땅하다며, 황후를 구박하고 핍박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황후가 황제 동치제를 자주 만나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다했다고 한다.

    서태후가 부부간에 서로 만나는 것도 방해하면서 황후를 심하게 핍박을 하자, 동치제는 어머니 서태후에 대해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점점 정치에 관심을 잃어갔고 타락해갔다고 한다.

     

     

    모후인 서태후의 탐욕와 횡포에 크게 실망한 동치제는 현실을 잊기위해서 매일밤마다 궁궐담을 넘어갔고, 기생집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주색잡기에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서태후는 아들이 주색잡기에 빠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하는데, 아들이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을수록 서태후 자신이 정사에 관여할 기회가 더 많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아들 동치제가 주색잡기에 빠지도록 만들고, 자신이 직접 아들을 대신해서 국가정무를 관장해나갔다고 한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아들 동치제가 술과 기생들에 빠져드는 것을 오히려 즐겼다고 한다. 일설에는 서태후가 환관에게 밀명을 내려서, 환관들이 동치제를 기생집으로 자주 데리고 가게해서, 결국 동치제가 환락과 주색에 빠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기생들과의 환락과 주색잡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던 동치제는 결국 20세의 젊은 나이에 매독에 걸려 숨졌다고 한다. 서태후는 아들 동치제가 죽자 마자, 황후에게 남편을 핍박했다는 거짓죄명을 씌워서 황후를 독살했다고 한다.

    자신이 권력의 최정점에 올라서기 위해서, 서태후는 자신의 친아들과 며느리마저 숙청했던 것이다.

     

    1875년 동치제가 죽은 후에, 서태후는 자신의 섭정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 4살밖에 안된 자신의 조카 광서제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고, 섭정을 지속해나갔다고 한다.

     

     

    많은 황족의 자제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4살베기 아이(광서제)를 황제로 만든 것인데, 자신의 수렴청정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4살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광서제는 자신의 여동생과 순친왕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서태후의 조카뻘인데, 역시 서태후의 권력행사를 위한 꼭두각시 황제일 뿐이었다.

     

    사실상 청나라의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던 서태후는 황실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사치의 여왕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서태후의 식사에는 30가지의 주식과 반찬으로 128가지의 산해진미들이 곁들여졌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반찬들은 한번에 결코 다 먹지도 못할 것인데, 식탐이 엄청 강했던 그녀의 탐욕과 사치 때문에, 식탁위에 올라온 것들이었다.

    오직 그녀의 사치와 탐욕을 위해서 엄청나게 백성들의 고휼을 짜낼 뿐이었다.

     

    이 당시 서태후의 한끼 식사값은 쌀 5000kg에 해당하는 양이었으며, 백성 1만명의 하루의 식사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하며, 지금 돈으로 800만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라고 하니, 그녀의 사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또한 서태후는 금박이 입혀진 비단옷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보유했다고 하는데, 그녀의 옷들은 3천개의 상자에 담겨 있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백성들의 고휼을 짜서 탈취해간 돈으로 서태후의 한끼 식사에 128개의 반찬들을 만들고, 3천개 상자 분량의 옷들을 만들어 입었을 정도로 탐욕와 사치의 극치를 달렸던 서태후는 측천무후와 더불어 중국역사상 가장 잔악하고 사치스러운 태후라는 악명이 붙을 정도였다.

     

    또한 서태후의 사치의 정점은 바로 황실정원인 이화원의 건립이다. 이화원은 원래 건륭제가 건립했던 궁궐정원인데, 아편전쟁 때에 이화원이 화제가 일어나고 소실되자, 서태후가 다시 더 화려하게 재건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자신의 궁궐정원인 이화원을 꾸미는 일에 무척이나 집착했다고 하는데, 이화원에 투입된 돈은 무려 3000만냥이라고 하며, 이 거대한 자금은 북방함대의 전력보강에 쓰여질 예산을 빼돌려서 마련했다고 한다.

     

    자신의 궁궐정원을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꾸미기 위해서, 서태후는 해군전력에 쓰일 예산까지 빼돌렸다고 하니, 서태후의 사치스러움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서태후가 해군전력 비용을 빼돌렸기 때문에, 북방함대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그로인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청일전쟁의 패배는 바로 서태후의 사치 때문에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대신들이나 내시, 궁녀들은 서태후를 몹시도 두려워해서 바른 말을 못했다고 한다. 그녀의 앞에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이유곡절하고 목숨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서태후 실제사진

     

    서태후는 치장을 할 때에 머리손질에 무척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왜냐하면 서태후는 탈모가 무척 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녀의 머리를 빗을 경우에 머리카락이 한 개라도 빠지기라도 한다면, 머리를 빗는 궁녀의 목숨이 날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궁녀들은 서태후의 머리를 빗을 때가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라고 하며, 궁녀들은 일부러 소매가 넓은 옷으로 갈아입고서 그녀의 머리를 빗었다고 한다.

     

    소매가 넓은 옷을 입으면, 서태후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넓은 소매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하루에 평균적으로 70개의 머리카락이 저절로 빠지는 것이 정상이다. 사람은 하루에 70개의 새로운 머리카락이 다시 나기 때문인데, 이것은 탈모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을 알지못했던 서태후는 자신의 미모를 최상으로 가꾸기 위해서, 머리를 빗는 궁녀들의 목숨들을 파리 목숨보다 더 못하게 여겼던 아주 패악한 태후였다.

    또한 서태후는 자신 앞에서 기침을 하거나, 실수를 한 내시나 궁녀들에게는 자신의 인분을 먹였을 정도로 잔악스럽고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았다고 한다.

     

    서태후는 권력욕심도 심했을 뿐만 아니라, 성미도 까다롭고 괴팍했고, 표독스럽고 잔악한 태후였다고 한다.

    거기다가 서태후는 엄청나게 쾌락을 추구했다고 한다. 남성편력으로 보았을 때 측천무후 못지않았다고 하는데, 서태후는 엄청나게 향략을 즐겼다고 한다.

     

    서태후도 측천무후처럼 중국 전역에서 잘생기고 젊은 남총들을 은밀하게 모집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태후의 침실로 들어가서 동침을 한 남총들은 왠만해서는 살아서 궁궐을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서태후의 은총을 받아서 그녀와 동침했던 남총들은 광란의 밤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서태후가 자신과 동침한 남성들을 죽인 이유는, 동침한 사실을 영원히 비밀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서태후의 하룻밤 쾌락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토사구팽을 당한 남총들이 수없이 많았다고 하며,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비밀리에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있는 남성들은 남총에 뽑히지 않기위해서, 오히려 관리들에게 금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서태후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중국의 수많은 젊은 남성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며, 그녀는 이러한 잔인한 살상을 저지르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잔인했다고 한다.

     

    서태후의 수렴청정을 이어나갈 목적으로 꼭두각시황제로 올라섰던 광서제는 나이가 19세가 되자, 황제로서의 자신의 권력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길 원했다.

    그렇지만 서태후가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훼방을 하는 바람에, 서태후와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태후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실권을 갖춘 진정한 황제가 되고자 했던 광서제는 서태후의 정치적 전횡과 관여를 막기 위해서 일대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 유심파대신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광서제는 군정실권을 장악하고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1898년에 유심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러한 개혁은 표면적으로는 근대화와 입헌군주제를 위한 개혁이었지만, 서태후와 보수파세력을 축출하기 위해서 벌인 정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원세개가 변심하는 바람에, 광서제의 권력장악을 위한 정변은 103일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원세개의 밀고를 통해 이를 알아낸 서태후의 반격으로 개혁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외국으로 쫒겨났고, 광서제는 붙잡혀서 이화원의 옥판당에 가택연금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또한 서태후는 광서제의 측근들도 제거했는데, 광서제가 총애하는 진비를 우물에 빠뜨려서 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의 상징인 궁궐정원인 이화원 사진

     

    조카인 광서제를 유폐한 서태후는 다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 또다시 기나긴 섭정(수렴청정)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오랫동안 아무도 그녀의 초법적인 권력행사를 막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태후는 청나라에서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으며, 황제조차도 그녀의 미움을 사면, 유폐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처지가 될 뿐이었다. 

    서태후는 10년 동안이나 조카인 광서제를 유폐하고 연금시켰으며, 자신이 실질적인 황제의 권력을 행사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1908, 서태후는 갑자기 이질에 걸려서 앓아누웠는데,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서태후는 조카 광서제를 죽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며, 조카 광서제가 죽은 그 다음날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조카를 죽인 다음, 광서제의 이복동생 재풍의 아들인 부의를 황제로 책봉했는데, 마지막황제로 알려진 부의가 황제로 책봉된 당시의 나이는 3살에 불과했다고 한다.

     

      마지막황제 부의(푸의)는 서태후가 이미 망쳐놓은 나라에서 4년간 재위하다가, 신해혁명으로 유폐되고 만다

     

    서태후는 죽기 직전까지 나이어린 꼭두각시 황제를 세워서 자신의 섭정권력을 이어나갈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것인데, 그녀가 얼마나 권력욕심이 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서태후는 죽기 하루전날까지도 3살베기 어린황제(푸이)를 세우고, 자신은 그뒤에서 수렴첨정을 이어나갈 욕심을 갖고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또다른 황제의 수렴첨정을 계획했던 그녀는 황제를 새운 그 다음날에 곧바로 죽었다고 한다.

       

    서태후가 죽은 후 4년이 지난 1912년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청나라를 완전 멸망하고

    만다.

    청나라가 이렇게 허약하게 멸망하게 된 것은 서태후가 48년간 청나라를 통치하면서 극도의 사치와 항략생활을 누림으로써, 국고를 낭비하고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서태후는 무려 48년 동안 권력을 행사했으며, 그녀가 행사한 권력은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이었으며, 그녀는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자신의 며느리인 황후를 죽이고, 조카인 광서제마저 죽이는 파렴치한 만행을 저질렀다.

     

    서태후는 권력에 방해된다는 판단되는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해버렸으며,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향락생활을 추구했던 희대의 요부이자 악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역사상 여태후, 측천무후와 더불어 서태후를 3대 악녀라고 부른다.

    이들 3명의 태후들은 중국역사상 가장 사악하고 표독스러운 악녀들로 큰 명성을 떨친 황가의 여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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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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