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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02 광해군의 업적과 폐위이유, 인조반정 김개시 3

목차

    광해군의 폐위이유와 인목대비, 애인 김개시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상 폭군과 성군의 두가지 이미지를 모두 다 갖고있는 임금이 바로 광해군이다.

    조선의 제15대 왕인 광해군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폭군이라고 하고, 다른 관점에서는 현명한 군주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등 이율배반적인 두가지 평가를 함께 받고 있는 왕이다.

     

    사실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은 폐모살제를 행하고 독선적인 정치를 행하였기 때문에, 폭군으로 낙인찍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정세가 급변하던 국제질서 속에서,

    합리적인 판단으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적절한 등거리 중립외교를 하는 등 군사외교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마련했던 현명한 군주라는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이같이 광해군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폭군이 되었다가 다시 성군이 되는 등, 한마디로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기가 정말 힘든 애매모한 임금이다.

     

      처음에는 광해군은 폭군으로 평가되었다가, 21세기 들어서 현명한 군주라는 재해석이 내려지면서 그가 이룬 업적에 대해서 다시 큰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광해군은 다시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그렇지만 최근에 방송들을 통해서 그의 악행들이 드러나면서, 또다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폭군쪽으로 기울어가는 듯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광해군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두사람이 있는데, 한사람은 바로 인목대비이고 다른 사람은 상궁 김개시이다

     

    특히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대립관계를 형성하면서, 성군의 이미지에서 폭군의 이미지로 변화해갔다고 볼 수 있다.

    광해군이 세자시절부터 왕위 재위 내내 선조의 왕비이자 계모인 인목대비와 대립관계를 형성하면서 치열한 암투를 벌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왕위계승 문제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의 소생으로 태생적으로 왕의 서자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는데,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못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의 후사를 이어야 하는 중대한 필요성 때문에, 서자인데도 운좋게 왕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죽고, 선조가 새로 맞이한 왕비인 인목왕후(인목대비)는가 불쑥 아들(영창대군)을 낳았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서자출신인 광해군이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그후에 선조의 정비인 인목대비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광해군과 인목대비는 왕위계승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이렇게 인목왕후(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을 낳고 난 후에, 선조에게 요청해서 자신의 처소를 돌보는 궁녀를 400명이나 충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목왕후(인목대비)의 처소에 배치시킨 400명의 궁녀들 중 100명의 궁녀들은 광해군처소에 있는 궁녀들이었다고 한다.

     

    , 인목왕후(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미래의 왕위경쟁자가 될 수 있는 광해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서, 그의 궁녀들을 축소시키는 공작을 벌인 것으로 판단된다.

     

    인목왕후(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고 난 후에, 선조의 후계자자리를 놓고, 인목왕후(인목대비)와 광해군간의 눈에 보이지않는 치열한 물밑 경쟁과 암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고 한다.

     

     

    서자로서 콤플렉스가 심했던 광해군에게는 왕의 정비인 인목대비와 정실의 자식인 영창대군은 그야말로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고, 자치하면 자신의 왕세자자리를 빼앗아갈지 모르는 정적 같은 존재감이었다.

     

    더욱이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선조는 인목대비를 총애한 나머지,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세우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조가 병(뇌경색)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광해군은 운좋게도 왕세자를 유지할 수 있었고, 1608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선조의 죽음과 관련해서, 독살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선조는 1608년 아직 젊은 57세의 나이에 석연치않은 이유로 죽었다고 한다.

    선조는 자신의 지병인 뇌경색에 걸려서 한동안 병석에 누워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누워있던 선조는 인목왕후(인목대비)의 정성스러운 병간호를 받고 난 후 다시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서, 다시 일어났다고 한다.

    병석에서 다시 일어난 선조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등 매우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일어나서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쾌차한 선조는 궁녀가 올린 약밥을 먹었다가, 그만 급체하고 쓰러졌고, 그리고 곧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숨을 거둔 선조의 얼굴빛이 검푸른빛이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독을 먹고 죽었을 때에 검푸른빛을 띤다고 한다그래서 그당시 장안에는 선조가 누군가에게 독살을 당해서 죽었다는 말이 퍼져나갔다고 한다.

      

    만일 선조가 정말로 독살당했다면, 선조를 독살할 사람은 광해군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선조는 정비의 아들이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것을 많이 후회하고 있었다고 하며, 자신이 총애하는 인목왕후(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내심적으로 왕세자로 세울 의도를 갖고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초인 광해군일기연려실기술에도 선조가 찹살떡을 먹다가 쓰러졌다’ ‘쓰러진 선조의 몸에는 이상하게도 검푸른 빛이 가득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초들은 승자가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기록은 당연히 없지만, 당시의 장안에는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루머가 퍼져있었다고 한다.

     

    결국 선조가 57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음으로써, 인목왕후(인목대비)는 겨우 25살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며, 3살베기 영창대군과 함께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보호막이 완전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뭏튼 광해군의 세자시절에 선조의 후계자자리를 놓고서, 광해군과 인목대비간의 엄청난 갈등과 대립관계를 형성하였지만, 결국 갑작스러운 선조의 병사로 인해서 광해군이 왕이 되면서, 광해군은 승자가 되었고 인목대비는 패자와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

     

    160834살의 나이로 조선의 15대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정적에 대한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유지에 방해가 될까 우려한 나머지,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도 괜한 역모의 누명을 씌어서 죽였다.

     

     

    또한 광해군은 세자시절부터 왕의계승의 경쟁관계였던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재남과 처가식구 3명을 거짓 역모혐의를 뒤집어씌워서 사사했다.

    그리고 인목대비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보냈다가, 끔찍하게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1618년 광해군은 자신의 의붓어머니나 다름없는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서궁에 유폐시키는 악행을 저지르고 만다.

     

    이미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을 잃고 아무 권력도 힘도 없어진 어머니나 다름없는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가둔 행위 때문에, 광해군은 사대부들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잃어가게 되었으며, 폭군으로서 낙인찍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광해군의 애인이자 정치참모 김개시

     

    광해군의 재위시절에 광혜군곁의 최측근으로는 대신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가 있었다.

    광해군의 재위시절에 이이첨과 김개시는 광해군의 통치를 옆에서 보필하는 최측근이었으며, 광해군이 피의 숙청을 하는 데도 앞장섰던 인물들이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을 역모자로 몰아서 사사하는 데에는, 당시 예조판서인 이이첨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이이첨과 김개시는 광해군의 총애와 후광을 등에 업고,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광해군정권의 2인자들이었다.

     

     

     

    광해군 처세 때에 국정을 농단하고 어지럽혔던 인물이 바로 상궁 김개시이다. 방송 '천일야사'에서 광해군과 최측근 김개시와의 끈적끈적한 관계를 다루고 있어서 큰 관심을 끌고있는 중이다.

     

    마치 지금의 상황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박대통령의 엄청난 후광을 입고 국정을 농단했던 최순실과 매우 유사한 인물이 바로 상궁 김개시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박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와 달리, 광해군과 김개시는 서로 연인관계였다고 하는 점이다.

    광해군이 종종 상궁 김개시와 동침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성은을 입은 김개시는 왕의 후궁이 되진 못하고 그냥 상궁으로만 계속 남았다고 한다.

     

    이 점이 매우 미스테리한 점이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광해군은 김개시를 총애하였고 동침까지 했지만, 김개시가 자신의 아버지인 선조의 후궁이었기 때문에, 남들의 보는 눈이 있기에 그녀에게 후궁의 첩지를 내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연인을 자신의 후궁으로 만드는 것 또한 패륜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니까 김개시는 광해군의 총애를 오랫동안 받았지만, 후궁이 아닌 상궁으로만 있었다. 그렇지만 김개시는 광해군의 다른 후궁들을 따돌리고 광해군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고 하며, 사실상 후궁대접을 받는 상궁이었다고 한다.

     

    광해군의 김개시에 대한 총애가 얼마나 컸던지, 김개시는 광해군의 정비인 유씨보다도 권세가 더 셌었다고 한다.

     

    광해군이 김개시를 총애했던 이유는 광해군이 세자로 있었을 때에 광해군이 왕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김개시의 큰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한다.

    당시 김개시는 세자궁에서 일하는 궁녀였는데, 선조가 세자궁을 드나들다가 우연히 본 김개시를 마음에 두고 품게되었다고 한다.

     

    김개시는 원래 머리가 영특하고 권모술수에 능란한 요부였기 때문에, 선조에게 온갖 여우짓을 다했다고 한다.

    얼굴은 별로 미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김개시가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그녀만의 간교한 애교술와 교활한 아첨 덕분으로 판단된다.

     

     

    광해군일기에는 김개시는 얼굴은 별로 안 예뻤지만, 꾀가 많고 영특했으며 흉악스러웠고 간교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개시는 특유의 간교한 애교와 아첨으로 선조와 광해군 두부자의 마음을 사로잡고서, 두사람 모두의 총애를 받으면서, 권력의 한복판에 서서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던 여장부였다.

     

    김개시는 여우같은 술수를 부려서 선조의 마음을 움직이고, 광해군이 왕의 첩지를 받을 수 있도록 광해군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광해군은 김개시를 총애하게 된 것이며, 왕이된 후에도 광해군은 김개시를 최측근으로 옆에두고 정권이 끝날 때까지 그녀를 감싸줬다고 한다.

     

    이렇게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교태를 부리고 아첨을 하면서, 광해군의 총애를 계속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김개시는 단순히 광해군의 애인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라, 광해군의 정치적인 참모역할도 했으며, 정치사건에도 크게 관여했다고 한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마음을 잃고서, 영창대군의 참살과 인목대비의 폐위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광해군의 커다란 총애로 권세가 더욱 커진 김개시는, 광해군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자신의 온갖 이권을 많이 챙겼다고 한다. 마치 지금의 최순실처럼 ~

     

    김개시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서 국가의 관직을 파는 매관매직을 많이 행했다고 한다. 국가의 중요한 의사결정에도 참여했을 뿐만아니라,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았던 김개시는 광해군정권 때에 2인자였던 이이첨만큼 권력이 대단했었다고 한다.

     

    김개시가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그녀의 전횡과 해악을 보다못한 윤선도와 ᆞ이회 같은 유학자들이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려서 김개시탄핵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광해군은 오히려 상소를 올린 윤선도와 이회를 무고죄를 물어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광해군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정권 말기, 반정이 일어날 시점에서 김개시는 광해군을 배반하고야 만다.

     

     

    1623년 광해군정권 말기 수차례에 걸쳐서 반정쿠테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상소가 많이 올라왔는데도, 김개시는 거짓된 상소라고 말하면서 광해군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같은 김개시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광해군은 쿠테타시도에 제대로된 대응을 하지못하게 되었고,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만다.

     

    정말로 아리러니한 인물이 바로 김개시라고 할 수 있다.

     

    선조에 이어서 광해군까지 2대에 걸쳐서 성은을 입었던 김개시, 그렇지만 끝내 후궁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권력의 실세로서 광해군을 쥐락펴락하면서,

    온갖 부귀를 다 누리고 폐악도 저질렀던, 광해군의 애인이자 정치적인 참모의 두가지 역할을 했던 김개시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개시는 광해군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동시에 광해군이 왕에서 폐위되는 데에도 일조한 인물이다.

     

    김개시의 이같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은 그녀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간에도 붙었다 쓸개에도 붙었다가 하는 천하의 아첨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김개시는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에 반정군의 뇌물을 얻어먹고서, 반정군에게 협조적인 행동을 했다고 한다.

    반정이 일어나기 며칠전부터 반정쿠테타가 일어난다는 상소가 여러차례 올라왔는데도 불구하고, 김개시가 연회를 개최해서 광해군애게 술을 먹이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광해군을 술에 쩔게 만듦으로써, 반정세력들이 군사적 저항을 적게받고 손쉽게 반정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광해군의 은덕을 그렇게 많이 받았던 김개시는 이미 반정세력의 쿠테타가 돌이킬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는 것을 알고서, 광해군을 배신하는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인조반정의 성공 이후에, 김개시는 반정세력들에게 결국 참수되었다고 한다. 반정세력들은 자신의 주군을 쉽게 배신하는 그녀를 살려둘 가치를 못느꼈던 것 같다.

       

    인조반정과 광해군 폐위와 폐위이유

     

    광해군이 집권한 후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를 중용하면서 독단적인 정치를 감행하자,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서인세력들은 광해군의 여러가지 실정과 폐단을 문제삼고서, 능양군을 옹립하면서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1623년 서인세력인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등은 광해군의 패륜정치의 척결을 명분으로 삼으면서, 능양군을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1623411일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반정세력들은 2,000명의 군사들을 동원해서 한성부를 공격했으며,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통으로 인해 반정은 손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반정군이 궁궐로 쳐들어올 당시에, 궁궐밖으로 도망가 의관집에 숨어었었던 광해군은 곧바로 붙잡히게 되었고,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 광해군과 함께 했던 대신들 40여명이 참수되었고, 그 외 200명의 사람들이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광해군과 그 일파를 몰아내며 반정에 성공한 반정세력은 능양군(인조)을 왕위에 옹립하고, 서인들의 정권을 다시 열어나간다. 

     

    그렇다면 반정세력들이 반정을 시도해서 광해군을 폐위시킨 폐위이유와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반정군은 궁궐을 접수하고 광해군을 체포하고 난 후, 다음과 같은 광해군의 죄상을 밝혔다고 한다.

     

    첫째 광해군은 무리한 궁궐축조 공사를 과도하게 벌여서, 백성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렸다.

     

    셋째 광해군은 명나라의 은공과 의리를 배반하고, 오랑캐인 청나라와 내통하고 화친하였다.

     

    셋째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했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폐륜을 저질렀다.

     

     

    이것이 반정세력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명분이면서, 동시에 광해군 폐위의 이유라고 한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간의 긴 전쟁을 치르면서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특히 수도인 한양의 도성과 궁궐들이 화제로 대부분 유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선조와 광해군 등 왕실세력들이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다시 한양에 돌아왔을 때에는, 경복궁은 불에 완전히 타버려서, 재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선조와 왕실사람들은 거처할 곳이 없어서, 양반저택을 임시로 개조해서 만든 덕수궁에서 지냈다고 한다. 당시의 덕수궁은 지금의 덕수궁처럼 화려한 것이 아니라. 양반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임시거처였다고 한다.

     

    그래서 광해군은 전쟁이 끝나고 국가를 다시 재건하는 과정에서, 불에 타서 없어진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등의 누각들을 다시 축조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기울어졌던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던 당시에, 무엇보다도 국가 권위의 상징인 궁궐을 다시 재건하는 것은 당연했다고 본다.

     

    이미 불에 타서 완전히 무너진 궁궐을 다시 복원하는 것은 임금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의무였다고 본다. 광해군이 아니더라도 어떤 군주라도 이같은 상황에서는 분명히 무너져버린 궁궐을 다시 재건했을 것으로 본다.

     

    무너진 궁궐을 다시 복구한 광해군의 행위를 폐위의 이유로 삼은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 내지는 무리한 설정이라는 느낌이 든다.

     

    전쟁으로 무너진 궁궐을 그대로 두고 재건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권위가 제대로 설 수 있겠는가? 또한 왕의 권위도 땅에 떨어질 것이며 국가기강이 제대로 세워지질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궁궐복원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각지방에 분배했는데, 공사비용을 거둬들이는 일부의 조도사들이 중간에서 갈취하거나, 과다비용을 청구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하며. 이들의 농간으로 일부지역의 백성들이 수탈을 당했다고 한다.

     

    광해군폐위의 둘째이유로 드는 것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배반하고, 후금(청나라)과 화친한 것이다.

     

    17세기 들어서면서 명나라와 후금(청나라)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광해군이 파명군으로 보낸 강홍립의 군대가 요동으로 출병해서 후금(청나라)과 싸우지도 않고, 몰래 후금에 항복했다고 반정세력은 주장을 펼쳤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에 목숨을 걸고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같은 반정세력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강홍립의 12,000명의 군대는 요동으로 가서 명나라를 도와서, 후금(청나라)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요동에서 후금(청나라)과 싸운던 명나라가 크게 패해서, 곧바로 후퇴해버렸다고 한다.

     

    전쟁의 주인공인 명나라는 조금 불리해지자 별로 싸우지도 않고 후퇴를 했는데도, 명나라 지원병으로 간 강홍립의 군대는 요동에서 후금(청나라)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후금(청나라)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강홍립군대는 군사 12,000명 중에서 과반수의 군사를 잃을 정도로 맹렬하게 싸웠다고 한다.

     

     

    그런데 명나라의 군대가 협조를 하지않고 도망가 버린 상태에서, 더이상 군사를 잃을 수가 없다고 판단한 강홍립장군은 불리해진 상황에서 후금(청나라)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반정세력이 주장했던 데로 강홍립군대가 후금(청나라)과 싸워보지도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며, 강홍립군대는 군사의 반을 잃을 정도로 싸웠던 것이다.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에서, 강홍립군대가 군사를 모두 잃으면서까지, 더 이상 후금(청나라)군대와 싸우는 것은 무리라고 보며, 명분이나 실익이 모두 없다고 본다.

     

    따라서 강홍립군대의 투항은 시기적절한 행동인 것이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 아닌 것이다. 명나라군대는 다 도망갔는데, 우리군대만 남아서, 남의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병사들이 다 죽을 때까지 싸울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이것을 가지고 반정세력들이 억지를 쓰는 것은, 중국(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동북아정세는 동북아의 패권자리를 놓고서,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이 서로 싸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후금(청나라)이 명나라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명에서 후금(청나라)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쇠퇴해가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나라)이 강성해지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으며, 쇠하는 명나라와 강성해지는 후금(청나라)사이에서 적절한 중립외교를 펼쳤으며,

    이러한 광해군의 중립외교 때문에 적어도 광해군 때에는 후금(청나라)의 침략을 한번도 받지 않았던 것이고, 조선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반정세력이 광해군의 폐위의 이유로 주장한 두가지는 광해군이 폐위를 당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폐위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거나, 폐위의 명분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세번째 폐위의 이유는 바로 폐모살제(廢母殺弟)로서, 광해군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을 말한다.

     

     

    광해군은 자신이 세자시절부터 왕위세습의 경쟁자였던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나 다름없는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는데, 바로 이러한 광해군의 행위가 성리학의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는 광해군의 가장 큰 잘못으로 지적된 것이다.

     

    의붓어머니를 죽이고 이복동생을 살해한 폐모살제(廢母殺弟) 행위가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로써 가장 타당성있는 이유라고 본다.

     

    전혀 반역을 도모하지도 않은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의 행위는 어떠한 명분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잘못한 행위이며, 누가 보더라도 욕먹을 짓을 한 것이다.

     

    광해군이 영창대군과의 왕위세습경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임금이 되었을 때에는, 선조가 이미 죽은 상태여서 이 당시의 인목대비와 3살베기 영창대군은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었다.

     

    이미 승자가 되어서 국가의 모든 권력을 휘어잡았던 광해군은 이들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게 승자의 배려를 보여주었어야만 했다.

     

    인목대비가 자신보다 9살이나 어렸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부인인 인목대비는 분명이 자신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감이었고, 도덕적 가치를 제일 중요시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다른 것을 몰라도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감금하는 행위는 임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성덕을 잃어버리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반정쿠테타의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으며, 가장 도덕적이어야 하는 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폐위시키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패륜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며, 반정세력들이 반정에 가담할 수 있는 대신과 군사들을 모으는 데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반정군들을 무려 2,000천명이나 모았을 정도로 반정세력은 큰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반정군들을 모을 수 있는 명분이 바로 광해군의 폐모살제인 것이다.

     

    한때는 경기도땅에서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백성들을 위해서 선정을 펼치기도 했던 영특했던 광해군이 어쩌다가 이런 패륜적 행위를 하게 되었을까?

     

    광해군은 폐위당하면서 패륜군주로 낙인찍혔지만, 한 때는 선정을 펼치기도 했던 현명한 군주였었다.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해서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줄여주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면서, 의병을 모았고 게릴라전쟁을 지휘해서 임진왜란에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광해군은 양전제를 실시해서, 토지에 대한 정확한 측량을 통해서, 토지결수에 비례한 정확한 세금을 메기고, 경작지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광해군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동북아의 질서가 바뀌는 격변의 시기에서, 적절한 중립실리외교를 펼쳐서, 한반도에 안전과 평화를 지켜낼 수가 있었다.

     

    이렇게 나름대로 적지않은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집권후기로 접어들면서,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한 폐모살제를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함으로써, 성군이 되지 못하고, 포악한 페륜군주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난 후, 새로 정권을 잡았던 인조 등 서인세력들은, 청나라를 철저히 배척하는 정책 때문에, 청나라의 15만대군의 침략을 받게되었고 청나라군대에 항복하고 말았으며, 인조가 청태조에게 아홉번 절하는 삼전도의 굴욕과 수모를 당하고야 만다.

     

    적어도 광해군이 균형감있는 중립외교를 펼칠 때에는, 이같은 전쟁의 패배나 삼전도의 굴욕 같은 수모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광해군의 폐위이유와 업적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어느쪽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서 광해군은 폭군이 될 수도 있고, 성군이 될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광해군은 원래는 선한 군주였는데, 이이첨, 김개시 같은 측근들이 눈과 귀를 막고 아첨하는 정치를 하는 바람에, 더욱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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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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