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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의 비, 중국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악행과 남총

     

    중국역사상 가장 잔혹한 황실역사를 만든 주인공이자, 희대의 악녀로 악명이 높은 여인이 바로 측천무후다.

    측천무후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여황제에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그 잔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던 악녀라고 할 수 있다.

     

    여태후, 서태후와 함께 중국의 3대악녀 중 한사람으로 알려진 측천무후의 잔인성을 세여자 중 최고라고 할 만큼, 정말 대단한 잔악스러움을 지닌 여황제였다.

     

    여태후와 서태후도 희대의 악행을 많이 범했는데도 자기 자식만큼은 죽이지는 않았지만, 오직 측천무후만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과 딸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그 결과 당나라 최고의 권력인 여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중국의 3대악녀 중 최고의 악녀로 손꼽히는 측천무후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생을 안정시켰다는 나름대로의 업적도 갖고 있는 상반된 두가지의 얼굴도 갖고있는 그녀다.

     

     

    중국역사상 가장 잔악하고 음탕한 요부라는 평가와 함께,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던 여걸이라는 두가지 평가를 함께 받고있는 측천무후는 두얼굴을 지닌 악녀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측천무후는 황위를 찬탈해서 여황제로 등극하고 난 후에, 수많은 남총을 끌여들여서 무안우치의 향락을 즐겼으며, 자신의 하룻밤 쾌락을 위해서 많은 젊은남자들을 희생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천일야사' 방송에서도 측천무후의 잔혹스러운 일대기를 소개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알면 알수록 경악과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희대의 요부 측천무후가 어떤 여성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측천무후의 원래 이름은 무조인데, 무조는 63614살의 나이로 궁궐에 입궁해서 당나라 태종의 시기에 궁녀가 되어 일했다고 한다.

    어느날 당태종이 자신이 다루지 못하는 성질이 거친 말을 어떻게 길들일지를 묻자, 당돌하게도 앞으로 나선 무조(측천무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궁녀의 신분으로서 당돌하게도 당태종 앞에 나선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에게 쇠채찍, 쇠망치, 비수 세가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거친말을 길들일 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는 말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쇠채찍으로 때려서 말을 듣게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쇠망치로 때리고,

    그래도 말을 안듣는다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말이니, 비수로 찔러 죽여버리는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측천무후 초상화

     

    이렇게 명쾌하게 답변한 무조(측천무후)를 보고, 당태종은 크게 만족해하면서, 그녀를 후궁으로 삼고자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늘의 별자리를 살펴서 나라의 운세를 점치는 태사령이 무조(측천무후)를 본 결과, 그녀에게서 역상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을 감지했다고 한다.

     

    태사령은 당나라황제 태종에게 무조(측천무후)를 후궁으로 삼을 경우에는, 장차 무씨에 의해서 역모가 일어나서 후손들이 큰해를 당하고, 황실의 대가 끊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말을 들은 당태종은 그이후로 한번도 무조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하며, 그녀에게 황실의 서가를 관리하는 직책을 주어서 일하게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미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던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의 매혹적인 용모를 내세워서, 태종 뿐만아니라 고종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허지만 무조는 끝내 태종의 성은을 입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엄청나게 강했던 무조(측천무후)는 온갖 간교와 권모술수를 다 부려서,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황후의 자리뿐만 아니라, 여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대단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온갖 간교를 다 부렸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는 당태종에게는 성은을 입지는 못했지만, 그 아들 고종으로부터 성은을 입었고, 후궁에서 황후자리까지 올라섰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아들을 죽이고 여황제에 오름으로써, 태종의 직계후손들의 씨를 말렸던 것이다.

     

    그 당시 당태종에게 말한 태사령의 예측은 나중에 그대로 적중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당태종이 고구려정벌에 실패한 후에 큰 병을 얻어서 병석에 눕게되자, 무조(측천무후)는 태종의 병간호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태종의 병문안을 왔던 고종은 무조(측천무후)의 아름다운 용모에 홀딱 반했다고 한다.

     

     

    자신의 빼어난 미모로 미래의 황제가 될 황태자(고종)를 완전히 홀린 무조(측천무후)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의 운명이 완전히 되바뀌게 된다.

     

    태종이 죽고 난 후에, 태종을 모시던 후궁이나 궁녀들은 모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어야 하는 것이 그당시의 법도이었기 때문에, 황실의 법도에 따라 무조(측천무후)도 어쩔 수 없이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무조(측천무후)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던 고종은 수시로 미행을 나가서, 절에 은거하던 무조(측천무후)를 만나 사통을 나눴다고 한다.

     

    무조의 미색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절에서 비구니로 지내던 그녀를 황제가 몰래 찾아와서 사통까지 나누었을까?

    고종의 이같은 밀행은 나중에 자신의 아들들을 희생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될 것을 그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몇 년 동안 비구니로 지내던 무조(측천무후)가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고종의 정비인 왕황후는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소숙비 때문에, 독수공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궁궐에서 고종을 사이에 두고, 정비인 왕황후와 소숙비 사이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왕황후는 소숙비를 견제를 하기 위해서, 고종이 마음에 두고있는 무조를 전격 궁궐로 불러들이게 된다. 황실의 법도에 따라서 숨어서 무조(측천무후)를 만나야만 했던 고종은 뛸 듯이 기뻐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자신의 후손들이 끊어지는 엄청난 재앙이 되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을 낳지못했던 왕황후는 소숙비의 아들이 장차 황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조(측천무후)를 궁궐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궁궐로 복귀한 무조(측천무후)는 소의의 첩지를 받고, 예상대로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고종과 소숙비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연찮게도 황후의 도움을 받고 비구니신세를 면하고, 다시 궁궐로 돌아올 수 있었던 무조(측천무후)는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야망이 워낙 컸던 무조(측천무후)는 결코 후궁으로만 만족할 수 없었다. 권모술수에 능했던 그녀는 자신의 연적인 왕황후와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 새로운 계책을 만들어낸다.

     

    무조(측천무후)는 고종의 성은을 입어서 딸(안정공주)을 하나 낳았는데, 그녀가 원했던 자식은 딸이 아닌 왕자였다고 한다. 자신이 왕자를 낳고 그 왕자를 황태자로 만들어야만, 자신이 황후가 되어서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딸을 낳은 것에 실망한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켜서, 두 연적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새로운 계책을 만들게 된다.

     

    무조(측천무후)는 아무도 몰래 자신의 딸의 목을 졸라서 숨을 끊어놓았고, 딸이 죽어있는 처소로 왕황우와 소숙비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의 초대를 받고서 그녀의 처소를 찾았던 왕황우와 소숙비는 그 방안에 안정공주가 죽어있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두 여자에게는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곧바로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의 처소로 고종을 불러들였고, 죽어있는 딸(안정공주)를 안고있던 왕황후와 소숙비는 꼼짝없이 딸의 살해범으로 의심받게 된 것이다.

    측천무후가 파놓은 함정에 왕황후와 소숙비는 빠져들었던 것인데, 측천무후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딸의 살해범으로 몰아서, 결국 두사람을 처형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어린 딸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두 연적을 모두 제거해버린 것이다.

    측천무후가 얼마나 잔악스러운지, 그리고 얼마나 권력욕심이 강한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만행은 이것이 끝이 아니며, 앞으로 더욱 많은 악행들이 그녀들 기다리고 있었다.

     

    황후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소숙비까지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한 측천무후는 그 후 여러명의 왕자들과 딸을 출산했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고 나서, 자신은 황후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무황후(측천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42녀를 낳았으며, 자신의 첫째아들을 황태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황후의 자리에 올라섰던 측천무후는 황후의 권력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권력의 맛을 옆에서 지켜봤던 그녀는 황후 그이상의 권력을 원했던 것이다.

     

    무황후(측천무후)는 고종이 정사를 펼치는 시기에도, 정사에 관여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고종이 멀쩡하게도 살아있는데도, 무황후(측천무후)는 사사건건 정사에 관여해서 전횡을 일삼았다고 한다.

     

     

    정치적 야심이 워낙 컸던 무황후(측천무후)가 필요 이상으로 정치에 개입하게 되자, 고종과 무황후(측천무후)사이에 기싸움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후 고종의 몸이 점점 쇠약해져갔고, 마침내 고종이 원인모를 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황후(측천무후)는 고종을 대신해 섭정에 나섰다고 한다.

    드디어 정사를 잡게된 무황후(측천무후)는 자신의 권력행사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고종의 외숙부인 승상 장손무기를 숙청해버리고, 그 집안을 풍비박산냈다고 한다.

     

    병을 앓고 있는 고종은 방속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고, 무황후(측천무후)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고 정사를 독단해 나갔다고 한다.

    황제 대신 용상에 앉아서 정사를 독단해나갔던 무황후(측천무후)는 권력에 완전히 심취해져갔고,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고종에게 황위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라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이제 나이도 먹고 병약해졌으니, 황태자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뒷방으로 물러나라는 요구였다. 비구니였던 자신을 총애해주고,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려준 고종에게 해서는 안될 요구를 측천무후는 거리낌 없이 했던 것이다.

     

     

    황후가 된 후에 주변사람들에게 엄청난 위세를 부리고, 기고만장해진 무황후(측천무후)의 만행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아픈 고종을 대신해서 정사를 돌봤던 무황후(측천무후)는 최고권력의 맛에 완전히 빠져버렸던 것이고, 자신이 맛본 최고의 권력을 아들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무황후(측천무후)는 황후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여황제가 될 야심을 품었던 것 같다.

     

    자신이 권력의 최고정점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길 바랬던 것이다.

    남편인 고종은 이미 병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자신의 최고권력에 방해가 될만한 인물은 아들인 황자들 뿐이었다.

     

    무황후(측천무후)는 황태자로 책봉된 자신의 첫째아들부터 먼저 제거했다. 측천무후의 첫째아들인 이홍은 황태자로 책봉되자 마자,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고 한다. 무황후(측천무후)의 첫째아들의 황태자책봉식이 있던 날, 누군가가 독을 넣은 음식을 먹고서, 곧바로 숨졌다고 한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후, 무황후(측천무후)의 둘째아들인 이현은 두번째로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어머니 무황후(측천무후)는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를 심하게 견제했다고 한다.

     

    둘째아들이자 황태자인 이현이 매우 영특했기 때문에, 이렇게 똑똑한 아들이 황제가 되면, 자신의 권력행사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던 무황후(측천무후)

    둘째아들에게 여색을 너무 밝혀 황제재목이 아니라는 말도 안되는 죄목을 붙여서, 그를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무황후(측천무후)는 유배지로 쫒겨난 둘째아들에게 사신을 보내서, 목을 메서 자살하도록 교사했으며, 결국 무황후의 둘째아들은 목을 메어 자살했다고 한다.

     

     

    자신이 최고의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친아들을 두명씩이나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패륜을 저질렀던 무황후(측천무후)는 사람의 탈을 쓴 악마나 다름 없었다.

    아무리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이렇게 천륜을 저버리고 친아들마저 죽일 수가 있을까,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두아들이 죽은 후, 무황후(측천무후)는 셋째아들인 이현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683년 고종이 사망하고 난 후에 황제의 재위를 물려받은 이현을 3개월만에 폐위시켜버리고, 자신의 말을 잘듣는 넷째아들 이단(예종)을 다시 새로운 황제로 책봉하게 된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가장 고분고분하고 말을 잘듣는 막내아들을 세로운 황제로 만들었고, 자신은 황제보다 더 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자신의 넷째아들을 허수아비황제로 전락시키고, 자신이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전권을 행사해나갔고,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만한 대신들은 역모죄를 뒤짚어 씌워서, 가차없이 처단해버렸다고 한다.

     

    주변에 자기에게 도전할 만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버리고 난 후, 690년에 측천무후는 허수아비황제였던 이단(예종)을 황제에서 폐위시켜버리고, 67세의 나이에 스스로 여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측천무후가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폐위시키고, 스스로 여황제가 되어서 새롭게 세운 나라는 주나라라고 한다.

     

     

    측천무후가 이렇게 전횡을 일삼는 동안에, 그녀의 통치에 반발하는 반란도 몇건 일어났지만, 이상하게도 하늘의 뜻이 그녀에게 있었던지, 측천무후는 반란군들을 손쉽게 토벌해버렸다고 한다.

     

    서경업의 반란과 이원가의 반란을 모조리 제압하고 난 후, 측천무후는 더 이상 방해세력이 없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통치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측천무후는 권력욕심도 강했지만, 쾌락이나 남색을 무척이나 밝혔다고 한다.

    67세의 나이에 여황제로 등극한 측천무후는 늦은 나이에도 자신의 쾌락적 본능을 여지없이 드러냈었다고 하는데, 중국 전역에서 수많은 남성들을 끌여들여서 향락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여황제가 되고 난 후에, 중국의 전역에서 젊고 잘생긴 남총들을 수천명을 모집해서 궁궐로 끌여들었으며, 밤마다 남총들을 바꿔가면서 광란의 밤을 즐겼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궁궐안 깊숙한 곳에 공학부라는 은밀한 내실을 만들었고, 이 공학부에 잘생기고 건강한 남총들을 머물게 하면서, 매일밤마다 남총들과 동침했다고 한다.

     

     

    중국 황실여성 중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섭섭할 정도로 음탕하고 호색한이었던 측천무후는 60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젊은 남총들을 불러들여 매일같이 쾌락을 즐겼다고 하는데, 만일 남총들이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목숨이 날아갔다고 한다.

     

    남총으로 뽑혔던 젊은 사내들은 공학부에 머물면서 낮에는 궁궐에서 잡일이나 심부름을 하면서 측천무후의 시중을 들었고, 밤이 되면 그녀의 잠자리상대가 되었다고 한다.

     

    당나라의 역사서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측천무후가 남총으로 뽑았던 젊은남성들의 수가 무려 3,000명이나 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측천무후는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한 남성편력을 지녔던 여성이자, 가장 음탕한 황실여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측전무후는 여색을 가장 많이 밝혔다고 평가되는 진시황제보다도 더 많은 수의 남자후궁들을 두었다고 할 수 있는데, 70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 남총들을 매일같이 상대했다고 하니, 정말 음탕하기 짝이 없는 천하의 요부라고 할 수 있다.

     

    측천무후는 만년에도 젊은 남총들에게 사로잡혀서,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자, 쿠테타가 일어났으며, 측천무후의 셋째아들이었던 중종이 쿠테타를 주도했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자신이 폐위시켰던 아들로부터 역공을 받아서, 결국 여황제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만다.

    705년경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측천무후는 15년동안 여황제로서 군림한 후에, 자신의 아들에 의해서, 폐위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무려 93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다. 희생된 사람 중에 대신들이 36명이고 왕족은 34명이며, 또한 놀랍게도 자신의 직계가족만 23명이나 된다고 한다.

     

    측천무후에게는 두가지 상반된 평가가 함께 내려지고 있는데, 하나는 국권을 튼튼히 지키고, 민생을 잘 돌보았던 여장부라는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 자식까지 살해하고, 향락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던 희대의 악녀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측천무후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서 민생을 잘 돌보았던 공적은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권력욕심에 사로잡혀서 자식들까지 희생시키고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업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측천무후가 범한 인륜에 위배되는 잔악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이 좋아야지만 그 결과가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측천무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중국황실을 어지럽히고 살생을 일삼았던 희대의 살인마라고 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측천무후는 여황제로서 폐위된 705년도의 12월달에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생전에 그녀는 자신의 묘비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실제로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있지 않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왜 죽으면서 자신의 비석에 글자를 쓰지못하게 했던 것일가?

    혹시 측천무후가 죽는 순간에, 자신의 과거의 악행들이 떠올랐고, 죽는 순간만큼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의 비석에 글자를 새기지 말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판단해 본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는 순간에는, 가장 선한 양심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최고의 권력을 탐했던 측천무후도 죽는 순간에는, 아마 자신의 권력욕심 때문에, 희생당했던 자식들의 얼굴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아무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도 떼어놓지 못하는 것이 부모자식간의 정인데,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에, 자신의 자식들을 희생시킨 측천무후도 죽을 때 만큼은 인간의 양심을 되찾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측천무후는 인간으로서 가장 잔악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최고의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측천무후는 희대의 악녀이자, 사이코패스일 뿐이라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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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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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3대악녀 서태후의 수렴첨정과 미모아들 광서제

         

      서태후는 중국황실에서 3명의 황제가 재위하는 동안, 직접 섭정을 꾀했던 권력야욕이 컸던 태후이며,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누렸던 청나라의 태후이다.

       

      후대사람들은 서태후를 중국의 3대악녀 중 한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서태후는 역대 황실의 여성으로서 측천무후와 더불어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던 요부이자, 사악한 여장부라고 평가할 만하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자신이 직접 여황제가 되어, 무소불이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서태후는 아들과 조카를 허수아비황제로 만들고, 자신이 배후에서 수렴첨정을 하는 방식으로 무소불이의 권력을 휘둘렀던 철의 여성이었다.

        

      서태후는 두명의 허수아비황제들을 세우고그 뒤에서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둘렀는데그녀는 무려 48년 동안이나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자신의 수렴첨정을 반대하는 대신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아들의 비까지 죽였으며조카인 동치제도 거침없이 암살했던 무자비한 태후였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행사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대신이든 혈육이든 가차없이 살육했을 정도로 무자비하고 난폭한 성미를 지녔다고 한다.

       

      서태후는 엄청난 사치를 일삼아서 청나라국고를 낭비했으며, 측천무후처럼 젊고 잘생긴 수많은 남총들을 불러들여서,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기도 했다.

      권력욕구의 측면에서는 중국의 역대 왕실여인 중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정도로 엄청난 권력욕심을 갖고 있었는데, 자신의 아들 동치제와도 권력싸움까지 벌였을 정도라고 한다.

       

      서태후는 청나라 9대황제인 함풍제 때에 궁궐에 17세의 나이로 궁녀로 들어왔다고 한다. 서태후는 궁녀시절에도 워낙 야심이 큰 여인이라서, 황제인 함풍제의 눈에 들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야망을 갖고있었다고 한다.

       

      궁녀시절 서태후는 궁궐에서 고양이를 잃어 슬피우는 연기를 펼쳐서, 황제인 함풍제의 눈에 들게 되었고, 후궁으로 책봉되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혹은 서태후의 목소리가 워낙 꾀꼬리처럼 곱고 노래를 잘해서, 함풍제가 지나가던 길목에서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함풍제의 눈에 들어서 황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서태후 실제 사진


      서태후는 궁녀시절에도 미모가 뛰어났고 목소리도 좋았기 때문에, 황제의 성은을 입고 후궁에 책봉될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서태후가 운이 무지하게 좋았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의 여인들 중 유일하게 그녀가 아들을 출산했기 때문이다.

       

      1856년 서태후는 함풍제의 성은을 입고 황제(함풍제)의 첫번째 아들(동치제)을 낳게 된다. 아들이 전혀 없었던 함풍제에게 첫아들을 낳아준 서태후는 의귀비에 책봉되지만, 유일한 황태자를 낳아주었기에 사실상 황후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서태후가 황자를 낳았을 당시에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가 있었는데, 황제의 후궁에 불과했던 서태후는 아들을 낳고 기세가 등등해져, 나중에 동태후와 권력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여나가게 된다.


        

      황자를 낳은 후 함풍제가 서태후의 처소를 자주 찾지않게 되자, 서태후는 함풍제의 총애를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자신의 외모를 최고의 미모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는고 하는데, 새똥으로 만든 옥욕산으로 세수를 했고, 피부를 곱게 만들기 위해서, 매일같이 진주를 갈아 마셨다고 한다.

       

      또한 서태후는 매일같이 두명의 산모를 불러다가, 그 산모들이 공급하는 신선한 모유를 하루 한잔씩 마셨다고 한다.

       

      서태후는 황자를 낳은 이후부터 서서히 그녀의 숨겨져왔던 정치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영국 등 구미열강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범하던시기였고,

      러시아가 청나라 북변의 땅을 전격적으로 정복해버리자, 함풍제는 화병이 들어서 병석에 드러눕게 된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와병을 기회로 삼았는데, 황제의 허락을 받아서 자신이 대리청정을 맡아 정사를 대신 돌보았다고 한다.

      황자를 낳고서 기세가 등등했던 서태후는 정치에까지 관심을 갖고 병석에 누운 함풍제를 대신해서 국사를 주물럭거리게 되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으로 사망하자, 서태후의 아들은 고작 6살의 어린나이에 황제(동치제)의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6살의 어린 황제(동치제)가 황위를 계승하게 되자, 모후인 서태후는 권력의 야욕을 숨기지않고, 어린 황제를 대신해서 본격적으로 섭정을 펼쳐나가게 된다.

        

      이 당시 죽은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함풍제의 후궁이자 동치제의 모후인 서태후가 청나라조정의 권력을 서로 양분하고 있었다.

      서열에서는 정비출신인 동태후가 위였으나, 유일한 황자를 출산한 서태후가 실권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서태후는 황제의 모후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이제 함풍제가 죽은 황실에서는, 자신보다 더 윗전인 사람은 동태후 한사람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동태후는 단지 서태후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감이었다.


       

      그렇지만 서태후에게는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함풍제가 죽기 직전에 서태후의 권력의 야심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죽은 후에 서태후가 권력을 농단하려고 한다면, 그녀를 죽이라는 유서를 남겨놓았다고 한다.

      서태후의 권력욕구가 얼마나 컸었기에, 함풍제조차도 그녀의 권력전횡을 죽으면서까지 문제 삼고 견제하였을까?

       

      그 함풍제의 유서를 갖고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동태후였으며, 동태후가 서태후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견제장치였던 것이다.

       

      아들 동치제가 17살이 되던 때까지 섭정을 해왔던 서태후는 동치제가 17살이 넘은 후에도 계속 정무에 관여했고, 동치제의 국정수행에도 사사건건 간섭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태후는 아들이 장성해서 성인이 된 뒤에도 권력을 아들에게 넘기려하지 않고, 계속 손아귀에 쥐고 있으려고 했다.

      아들(동치제)가 장성한 이후에도 권력을 놓지않으려고 했던 서태후와 아들 동치제간의 권력을 놓고 서로 심한 마찰까지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서태후와 아들 동치제간의 권력을 놓고 알력이 생기자, 동태후가 그 틈을 비집고 동치제와 긴밀하고 가까운 관계를 형성해갔다고 한다.

       

       

       

      권력의 정점에서 서태후와 대립관계였던 동태후가 오히려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와 더욱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함풍제의 제사를 지내러 가던 날에 동태후와 서태후간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황실사람들과 조정백관이 함께 함풍제릉에 제사를 지내러 가던 날에 서태후가 동태후와 나란히 걸어가자, 동태후가 서태후를 조정백관이 보는 앞에서 크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후궁출신인 서태후가 제1황후인 동태후와 나란히 걸을 수 없다고 여긴 동태후가 서태후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호통을 쳤고, 많은 조정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톡톡히 당한 서태후는 동태후에게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고 한다.

      동태후는 황후출신이지만 서태후는 후궁출신이기 때문에, 서로간에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서태후는 잔꾀를 부려서 동태후의 환심을 사고 그녀를 감동시킨 뒤에, 자신을 처단할 수 있는 위임장인 그 유서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동태후가 감기에 걸려 며칠간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서태후가 보낸 약을 먹고 난 후 동태후는 감기가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서태후는 팔에 붕대를 감고, 동태후를 찾아가서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내고, 그 피를 섞어서 만든 감기약이 효험을 보아서 동태후가 감기에서 낫게됐다고 거짓고변을 했고, 그 말에 감동을 받았던 순진한 동태후는 함풍제의 유서를 꺼내어서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언제든지 서태후가 권력을 농단하고 왕실을 어지럽히면, 그녀를 죽여도 좋다는 함풍제의 유서는 서태후의 잔꾀로 인해서 불살라 없어지고 말았다.

       

      자신을 옥죄었던 함풍제의 유서가 사라지게 되자, 서태후는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어졌고, 동태후에 대한 태도는 바로 돌변하게 되었고, 며칠 후에 동태후는 서태후가 보낸 전병을 먹고난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동태후가 없어진 후에, 서태후는 본격적인 야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황제의 머리위에 올라서서 국가정사를 제멋대로 주물렀으며, 온갖 전횡을 일삼으면서 갖은 횡포를 다 부리게 된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행사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충신들을 가차없이 죽였는데, 재원, 단화, 숙순 같은 고명대신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해버렸다.

       

      서태후는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의 정비인 황후가 못마땅하다며, 황후를 구박하고 핍박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황후가 황제 동치제를 자주 만나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다했다고 한다.

      서태후가 부부간에 서로 만나는 것도 방해하면서 황후를 심하게 핍박을 하자, 동치제는 어머니 서태후에 대해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점점 정치에 관심을 잃어갔고 타락해갔다고 한다.

       

       

      모후인 서태후의 탐욕와 횡포에 크게 실망한 동치제는 현실을 잊기위해서 매일밤마다 궁궐담을 넘어갔고, 기생집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주색잡기에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서태후는 아들이 주색잡기에 빠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하는데, 아들이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을수록 서태후 자신이 정사에 관여할 기회가 더 많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아들 동치제가 주색잡기에 빠지도록 만들고, 자신이 직접 아들을 대신해서 국가정무를 관장해나갔다고 한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아들 동치제가 술과 기생들에 빠져드는 것을 오히려 즐겼다고 한다. 일설에는 서태후가 환관에게 밀명을 내려서, 환관들이 동치제를 기생집으로 자주 데리고 가게해서, 결국 동치제가 환락과 주색에 빠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기생들과의 환락과 주색잡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던 동치제는 결국 20세의 젊은 나이에 매독에 걸려 숨졌다고 한다. 서태후는 아들 동치제가 죽자 마자, 황후에게 남편을 핍박했다는 거짓죄명을 씌워서 황후를 독살했다고 한다.

      자신이 권력의 최정점에 올라서기 위해서, 서태후는 자신의 친아들과 며느리마저 숙청했던 것이다.

       

      1875년 동치제가 죽은 후에, 서태후는 자신의 섭정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 4살밖에 안된 자신의 조카 광서제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고, 섭정을 지속해나갔다고 한다.

       

       

      많은 황족의 자제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4살베기 아이(광서제)를 황제로 만든 것인데, 자신의 수렴청정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4살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광서제는 자신의 여동생과 순친왕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서태후의 조카뻘인데, 역시 서태후의 권력행사를 위한 꼭두각시 황제일 뿐이었다.

       

      사실상 청나라의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던 서태후는 황실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사치의 여왕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서태후의 식사에는 30가지의 주식과 반찬으로 128가지의 산해진미들이 곁들여졌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반찬들은 한번에 결코 다 먹지도 못할 것인데, 식탐이 엄청 강했던 그녀의 탐욕과 사치 때문에, 식탁위에 올라온 것들이었다.

      오직 그녀의 사치와 탐욕을 위해서 엄청나게 백성들의 고휼을 짜낼 뿐이었다.

       

      이 당시 서태후의 한끼 식사값은 쌀 5000kg에 해당하는 양이었으며, 백성 1만명의 하루의 식사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하며, 지금 돈으로 800만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라고 하니, 그녀의 사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또한 서태후는 금박이 입혀진 비단옷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보유했다고 하는데, 그녀의 옷들은 3천개의 상자에 담겨 있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백성들의 고휼을 짜서 탈취해간 돈으로 서태후의 한끼 식사에 128개의 반찬들을 만들고, 3천개 상자 분량의 옷들을 만들어 입었을 정도로 탐욕와 사치의 극치를 달렸던 서태후는 측천무후와 더불어 중국역사상 가장 잔악하고 사치스러운 태후라는 악명이 붙을 정도였다.

       

      또한 서태후의 사치의 정점은 바로 황실정원인 이화원의 건립이다. 이화원은 원래 건륭제가 건립했던 궁궐정원인데, 아편전쟁 때에 이화원이 화제가 일어나고 소실되자, 서태후가 다시 더 화려하게 재건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자신의 궁궐정원인 이화원을 꾸미는 일에 무척이나 집착했다고 하는데, 이화원에 투입된 돈은 무려 3000만냥이라고 하며, 이 거대한 자금은 북방함대의 전력보강에 쓰여질 예산을 빼돌려서 마련했다고 한다.

       

      자신의 궁궐정원을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꾸미기 위해서, 서태후는 해군전력에 쓰일 예산까지 빼돌렸다고 하니, 서태후의 사치스러움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서태후가 해군전력 비용을 빼돌렸기 때문에, 북방함대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그로인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청일전쟁의 패배는 바로 서태후의 사치 때문에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대신들이나 내시, 궁녀들은 서태후를 몹시도 두려워해서 바른 말을 못했다고 한다. 그녀의 앞에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이유곡절하고 목숨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서태후 실제사진

       

      서태후는 치장을 할 때에 머리손질에 무척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왜냐하면 서태후는 탈모가 무척 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녀의 머리를 빗을 경우에 머리카락이 한 개라도 빠지기라도 한다면, 머리를 빗는 궁녀의 목숨이 날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궁녀들은 서태후의 머리를 빗을 때가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라고 하며, 궁녀들은 일부러 소매가 넓은 옷으로 갈아입고서 그녀의 머리를 빗었다고 한다.

       

      소매가 넓은 옷을 입으면, 서태후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넓은 소매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하루에 평균적으로 70개의 머리카락이 저절로 빠지는 것이 정상이다. 사람은 하루에 70개의 새로운 머리카락이 다시 나기 때문인데, 이것은 탈모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을 알지못했던 서태후는 자신의 미모를 최상으로 가꾸기 위해서, 머리를 빗는 궁녀들의 목숨들을 파리 목숨보다 더 못하게 여겼던 아주 패악한 태후였다.

      또한 서태후는 자신 앞에서 기침을 하거나, 실수를 한 내시나 궁녀들에게는 자신의 인분을 먹였을 정도로 잔악스럽고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았다고 한다.

       

      서태후는 권력욕심도 심했을 뿐만 아니라, 성미도 까다롭고 괴팍했고, 표독스럽고 잔악한 태후였다고 한다.

      거기다가 서태후는 엄청나게 쾌락을 추구했다고 한다. 남성편력으로 보았을 때 측천무후 못지않았다고 하는데, 서태후는 엄청나게 향략을 즐겼다고 한다.

       

      서태후도 측천무후처럼 중국 전역에서 잘생기고 젊은 남총들을 은밀하게 모집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태후의 침실로 들어가서 동침을 한 남총들은 왠만해서는 살아서 궁궐을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서태후의 은총을 받아서 그녀와 동침했던 남총들은 광란의 밤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서태후가 자신과 동침한 남성들을 죽인 이유는, 동침한 사실을 영원히 비밀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서태후의 하룻밤 쾌락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토사구팽을 당한 남총들이 수없이 많았다고 하며,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비밀리에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있는 남성들은 남총에 뽑히지 않기위해서, 오히려 관리들에게 금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서태후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중국의 수많은 젊은 남성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며, 그녀는 이러한 잔인한 살상을 저지르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잔인했다고 한다.

       

      서태후의 수렴청정을 이어나갈 목적으로 꼭두각시황제로 올라섰던 광서제는 나이가 19세가 되자, 황제로서의 자신의 권력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길 원했다.

      그렇지만 서태후가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훼방을 하는 바람에, 서태후와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태후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실권을 갖춘 진정한 황제가 되고자 했던 광서제는 서태후의 정치적 전횡과 관여를 막기 위해서 일대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 유심파대신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광서제는 군정실권을 장악하고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1898년에 유심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러한 개혁은 표면적으로는 근대화와 입헌군주제를 위한 개혁이었지만, 서태후와 보수파세력을 축출하기 위해서 벌인 정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원세개가 변심하는 바람에, 광서제의 권력장악을 위한 정변은 103일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원세개의 밀고를 통해 이를 알아낸 서태후의 반격으로 개혁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외국으로 쫒겨났고, 광서제는 붙잡혀서 이화원의 옥판당에 가택연금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또한 서태후는 광서제의 측근들도 제거했는데, 광서제가 총애하는 진비를 우물에 빠뜨려서 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의 상징인 궁궐정원인 이화원 사진

       

      조카인 광서제를 유폐한 서태후는 다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 또다시 기나긴 섭정(수렴청정)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오랫동안 아무도 그녀의 초법적인 권력행사를 막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태후는 청나라에서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으며, 황제조차도 그녀의 미움을 사면, 유폐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처지가 될 뿐이었다. 

      서태후는 10년 동안이나 조카인 광서제를 유폐하고 연금시켰으며, 자신이 실질적인 황제의 권력을 행사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1908, 서태후는 갑자기 이질에 걸려서 앓아누웠는데,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서태후는 조카 광서제를 죽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며, 조카 광서제가 죽은 그 다음날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조카를 죽인 다음, 광서제의 이복동생 재풍의 아들인 부의를 황제로 책봉했는데, 마지막황제로 알려진 부의가 황제로 책봉된 당시의 나이는 3살에 불과했다고 한다.

       

        마지막황제 부의(푸의)는 서태후가 이미 망쳐놓은 나라에서 4년간 재위하다가, 신해혁명으로 유폐되고 만다

       

      서태후는 죽기 직전까지 나이어린 꼭두각시 황제를 세워서 자신의 섭정권력을 이어나갈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것인데, 그녀가 얼마나 권력욕심이 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서태후는 죽기 하루전날까지도 3살베기 어린황제(푸이)를 세우고, 자신은 그뒤에서 수렴첨정을 이어나갈 욕심을 갖고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또다른 황제의 수렴첨정을 계획했던 그녀는 황제를 새운 그 다음날에 곧바로 죽었다고 한다.

         

      서태후가 죽은 후 4년이 지난 1912년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청나라를 완전 멸망하고

      만다.

      청나라가 이렇게 허약하게 멸망하게 된 것은 서태후가 48년간 청나라를 통치하면서 극도의 사치와 항략생활을 누림으로써, 국고를 낭비하고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서태후는 무려 48년 동안 권력을 행사했으며, 그녀가 행사한 권력은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이었으며, 그녀는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자신의 며느리인 황후를 죽이고, 조카인 광서제마저 죽이는 파렴치한 만행을 저질렀다.

       

      서태후는 권력에 방해된다는 판단되는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해버렸으며,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향락생활을 추구했던 희대의 요부이자 악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역사상 여태후, 측천무후와 더불어 서태후를 3대 악녀라고 부른다.

      이들 3명의 태후들은 중국역사상 가장 사악하고 표독스러운 악녀들로 큰 명성을 떨친 황가의 여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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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 암살. 독살한 범인 2명의 여성

         

        북한에서 또다시 피의 숙청바람이 불고있는 것 같다. 213일날 김정일의 첫째아들이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되었다고 한다.

         

        213일 오전 9시경 김정남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마카오행 탑승수속을 밟던 도중에, 2명의 정체모를 여성들에게 기습적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이날 공항내에 설치된 셀프체크기기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신원미상의 여성들로부터 이물질투척을 받고서 쓰러져 숨을 거뒀다고 한다.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김정남은 두여성으로부터 독성스프레이를 맞고사망했다고 하지만다른 일각에서는 독침을 맞고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현지 CCTV영상과 주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이 알려지고 있다.

        김정은은 13일 오전 9시경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마카오행 셀프체크기기를 사용하던 도중, 뒤에서 정체모를 두명의 여성들이 다가왔고, 두여성은 기습적으로 뒤에서 김정은을 잡고서 독극물액체를 얼굴에 뿌렸다고 한다.


         

        독극물투척을 받은 김정남은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공항치료소로 이송되었고, 이후 앰블런스로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현재 말레이시아경찰은 숨진 김정남의 시신을 수습한 상태이며, 김정남살해에 가담한 용의자들을 추격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을 이처럼 끔찍하게 살해할 수 있는 사람이나 세력은 누구일까?

        김정남을 독살한 사람은 두명의 여성들이지만, 그녀들에게 김정남암살을 지시한 세력은 북한의 김정은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최근 북한의 김정은이 김정남에게 북한으로 소환명령을 내렸지만, 김정남은 기절했다고 하며, 김정남의 소환명령 불응에 대한 보복으로 김정은이 살해하도록 조치를 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의 CCTV에 김정남을 암살했던 한 여성의 모습이 찍혔다고 한다.

        김정남살해 용의자로 보이는 그 여성은 하얀색의 윗도리와 청바지를 입었고, 푸른백을 메고있으며, 하얀피부에 단발머리를 한 모습이다.

         

        현지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김정남 살해용의자인 두명의 여성을 태워날랐던 택시기사가 경찰조사에서 두 여성은 북한여성은 아니며, 베트남국적의 여성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경찰의 조사결과, 이 두 여성이 김정남암살에 사용한 독극물이 일반인들이 구하기 힘든 무척 강력한 독극물이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말레이시아경찰은 김정은의 부검을 실시해서 보다 정확한 사인분석을 진행한다고 한다.


         

          CCTV에 찍힌 김정남을 독살한 여성의 사진

         

        두명의 여성살해범들은 아직 말레이시아를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으로 보고, 두 용의자들를 추적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김정남을 살해한 세력이 누구인지 큰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그동안 김정남이 여자관계가 매우 복잡했기 때문에, 김정남의 여성편력에 불만을 품은 여성이 사주해서 살해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는 상태다.

         

        그렇지만 김정남이 숨지자 마자, 말레이시아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긴급하게 김정남시신의 인도를 요청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북한의 공작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국정원은 이번 김정남살해는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청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은 과거 5년 전부터 김정남암살을 준비해왔다고 하며, 실제로 김정남암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고 한다.


        김정남의 부인과 아들은 현재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당국의 특별한 신변보호를 받고있다고 한다.

         

        이번 김정남 살해공작을 꾸민 주체는 누가 보더라도 북한 김정은일 가능성이 농후해보인다.

        북한 김정은은 2011년 권력을 잡은 이후에, 맏형이자 김정일의 장자인 김정남을 매우 껄끄럽게 생각해왔으며, 자신의 권력에 대한 큰 위협세력으로 생각해오고 있었다.

         

        김정은은 자신이 북한의 권력을 휘어잡고 최고지도자로 올라섰지만,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어 왔을 정도로, 아직까지 그의 권력기반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만일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북한의 급변사태가 일어날 경우에, 항상 김정남이 자신의 대타자로 거론되어 왔던 것을 김정은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김정은에게 있어서는 이복형 김정남은 자신의 권력을 뒤흔들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고 인식해왔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김정남은 북한의 3대세습체제를 많이 비판해왔다고 한다.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고모부 장성택까지도 처참하게 학살을 자행했던 김정은은 자신의 권력체제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이복형 김정남을 어떻게든 처리하고자 했을 것이다.

         

        김정남을 살해한 여성으로 현지공항 CCTV에 찍힌 영상사진

           

        김정은은 2011년 북한의 최고권력을 잡은 이후, 리영호 북한군 총참모장을 처형한 것을 비롯해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 최영건내각부총리 처형, 장성택 처형등 여러명의 북한의 지도층인사들을 처형함으로서, 자신의 권력에 대한 공고화작업을 진행해왔다.

         

        김정은 여러명의 북한 간부급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해서 자신의 권력을 단단하게 다져왔는데, 이제 그에게는 이복형 김정남이 마지막으로 남은 위협세력이자 숙청대상자였을 것이다.

         

        김정은은 장차 자신의 권력에 가장 큰 위협세력이 될 수 있는 김정남을 죽임으로서, 후환을 없애고자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은 미래의 격변기에 불안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김정남을 미리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 김정남은 장성택에 이어 북한 권력투쟁의 또다른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 들어온 소식인데, 말레이시아경찰이 15일날 쿠알라룸푸르공항앞에서 대기중이던 김정남 살해용의자 한 여성을 체포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경찰에 전격 체포된 여성은 베트남행 여객기를 타기위해 공항으로 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경찰의 조사결과,

        이 여성이 CCTV에 찍혔던 김정은 살해여성과 동일한 여성이라고 하며, 이 여성은 현재 셀랑고르경찰서에 구금되어서 조사를 받고있다고 한다.

         

        현지 언론매체에 의하면, 이날 체포된 여성이 바로 13일날 김정은 살해 당시에 독살을 시도했던 두명의 여성 중의 한명이라고 한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번 김정남 살해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6명이라고 하며, 여자 2명과 남자 4명으로 이뤄진 일당들 중 한명이 체포되었다고 밝혔으며, 나머지 5명의 용의자들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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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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