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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강의 파이터 최영의의 무도여행과 실전무술, 료마, 진노인과의 대결

     

    최영의 192364~ 1994426

     

    오늘날 UFC 같은 격투기대회가 치러지면서 세계적인 무술고단자들이 대결을 펼쳐서 최강의 자리를 가리고 있다.

    그렇지만 UFC같은 격투기대결도 규칙이 있고, 일정한 체급의 한계를 갖고 대결을 펼치기 때문에 한계점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의 UFC 같은 격투기경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60여년 전에, 규칙이나 체중한계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전 일본무도계에 도전장을 내밀고 난다긴다하는 가라데의 고수들을 수없이 쓰러뜨리고,

    세계의 강호들을 찾아 무도여행을 떠났던 진정한 극강의 무술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최배달(최영의)이다.

     

    최배달, 최영의는 일본의 내노라하는 가라데의 고수들에게 도전해서 모두 쓰러뜨렸을 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진출해서 미국, 브라질, 중국, 태국, 유럽의 무술강호들을 추풍낙옆처럼 쓰러뜨리면서,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떨쳤던 세계 최강의 파이터였다.

     

    지금으로부터 60~70여년 전에 배고프고 열약했던 그 시대에 최고의 무도가가 되기 위해 목숨 걸고 떠난 최배달의 무도여행에서,

    는 총 200명의 무술인들과 대결을 펼쳐서, 200번 모두 승리하는 전대미문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니, 실로 최배달(최영의)1940~50년대의 세계최강의 무도인이자 파이터라고 할만 하다.


     

    최배달은 자신의 무술실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1946년도부터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가라데고수들에게 도전해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최배달은 실전공수의 대가 사카하라와 대결해 승리했고, 일본의 닌자 미야노부오와 대결해 승리했고, 유도의 대가 니노 이글과 대결해 승리했고, 가라데의 고수 유리 다쓰오와 대결해 승리했고, 검객 료마와 대결해 승리했다.

     

    또한 최배달은 일본무도계에서 더 이상 적수가 없자, 50년도부터는 미국과 중국, 동남아시아와 유럽 등으로 원정을 떠나서, 세계의 무술강호들과의 대결을 펼쳐나갔다.

     

    미국의 북미 레슬링챔피언 레드 아이와 대결해 승리했으며, 레슬러 뮤이슈킨과 대결해 승리했고, 프랑스의 사바트의 제왕 보몬과 결투해서 승리했고, 태국 무에타이 실력자 블랙 코브라와 대결해 승리했고, 발리에서 카포엘라의 고수 세울로와 대결에서 승리했을 뿐만아니라, 이란 궁정봉술의 대가와도 대결해 승리했으며, 미국 프로레슬링의 무법자 붉은전갈 톰 라이스와 대결해서 승리했다.

     


    최배달은 이렇게 일본전국은 물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무술강자들에게 도전해서 200200승의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최영의가 세운 이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UFC단체의 각체급 챔피언들은 잘해야 30전을 넘기가 힘든데다, 치명적인 공격은 하지못하게 하는 경기규칙이 있는데다, 체급안에서만 싸운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배달이 세운 200200승 무패의 실전기록은 그 어떤 격투기챔피언들도 달성할 수 없는 최고의 기록으로서, 앞으로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기록일 것이다.

     

    지금같은 격투기대회가 전혀 없었던 40~50년대에 최배달(최영의)는 규칙이나 룰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만나는 무도인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대결을 펼쳤던 상대들마다 모두 쓰러뜨렸다.

     

     

    최배달과 싸웠던 상대들 중에는 몽둥이를 갖고 덤볐던 상대방도 있었으며, 일본도를 휘두르면서 덤볐던 상대도 있었으니, 최배달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대결을 펼쳤던 것이다.

    지금의 아무리 강한 UFC챔피언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큰칼을 들고 덤빈다면, 틀림없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것이다.

     

    그렇지만 비겁한 걸 싫어했고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했던 최배달은 일본도를 휘두르는 검도의 달인과 우직하게 맞대결을 펼쳤고, 그리고 당당히 그를 물리쳤다.

    지금 최배달의 무도행각을 전해들으면 모두 신화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의 무도경력은 모두 사실이며, 그는 명실상부한 100년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최고의 파이터라고 할 수 있다. 

     

    최배달의 160의 대결

     

    최영의의 지상최대의 대결은 한 일본가라데도장에서 펼쳤던 56인 대 일의 대결이다.

     

    최영의 즉 최배달이 한창 도장깨기를 하러 일본전역을 돌아다니고 있을 당시에, 한 일본 가라데도장의 관장이 자신이 말과 대결을 하여 한주먹에 말을 쓰러뜨렸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말을 쓰러뜨린 게 그렇게 대단한 성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최배달은 그 가라데도장을 방문해서 그 일본인관장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참고로 최배달은 47마리의 소와 대결을 펼쳐서 모두 쓰러뜨린 전과가 있다.

     

    최배달이 그 가라데도장을 방문해서 일본인관장에게 도전장을 던지자, 그 일본인관장은 비겁하게도 자신은 뒤로 빠지면서 자신의 가라데제자들을 모두 불러모았고, 최배달에게 자신의 제자 60명을 모두 쓰러뜨린다면 도전을 받아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가라데관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은 제자들 뒤에 숨고서, 제자들에게 대신 싸우도록 했던 것이다. 정말 비열하기 그지없는 졸장부 가라데관장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우직한 최배달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가라데도장안에 있는 60명의 수련생들과 실제로 601의 말도 안되는 대결을 펼쳤던 것이다.

     

    지금의 뛰어난 격투기챔피언들이라고 해도 혼자서 60명의 가라데인들과 대결을 벌이라고 하면, 모두 다 도망갈 것이다.

    그렇지만 가라데도장 안에 발을 들여놓은 최배달은 우직하게 말도 안되는 601의 대결을 펼쳤고, 혼자서 좌충우돌하면서 달려드는 가라데수련생들을 하나둘씩 쓰러뜨려나갔다.

     

    두시간 동안 거짓말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수십명의 가라데인들이 최배달의 정권치기와 발차기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졌다.

    최배달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가라데도장의 단원의 절반을 혼자서 쓰러뜨리자, 그 가라데관장은 겁을 벌컥 집어먹고는 꽁수를 부렸다.

     

    가라데관장은 제자들에게 도장 바닥에 기름을 바르도록 해서 최영의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바닥을 미끄럽게 만들었다.

     

    도장 바닥이 온통 기름이 칠해져서 미끄러워 최배달이 공격하기가 힘들어졌지만, 여기서 포기한다면 최배달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가라데도장 바닥에 온통 기름칠을 해서 미끄러워 더 이상 대결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최배달은 포기하지 않았다.

    최배달은 자신의 띠 천조각을 반으로 찢어서 그 천조각으로 두발을 돌려서 묶어버렸다.

     

    , 최배달은 천조각으로 양쪽 발을 감싸서 기름칠에 미끄러지지 않게 만들었고, 그런 상태에서 남아있던 가라데대원들을 또다시 공격해서 쓰러뜨려나갔던 것이다.

     

    이같은 최배달의 불굴의 도전정신은 정말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최배달에게 불리한 1 대 60의 싸움이었으며, 최배달의 패배가 명확했던 대결이었다.

     

    그렇지만 패배를 죽기보다 싫어했던 최배달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으며, 결국 가라데 대원 56명을 모두 쓰러뜨린 후에, 대결이 끝이 났다고 한다.

     

    그 가라데 도장의 단원 60명 중 56명을 쓰러뜨리자, 지켜보고 있던 가라데관장이 엄청 겁을 먹고서, 최영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항복을 했다고 한다.

    혼자서 위험천만한 적진으로 뛰어들어가서, 혼자서 56명의 가라데단원들을 쓰러뜨렸고, 결국 가라데관장의 항복을 받아내는 수훈을 세운 것이다.

     

     

    이 이야기는 100% 실화이며, 방학기의 책 바람의 파이터에도 나오는 내용이며, 90년대 초반 주병진쇼에 전격 출현했던 최영의선생이 방송에서 직접 얘기했던 내용이다.

     

    다음은 최배달의 무도여행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몇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무사시노벌판의 일대 30의 대결

     

    최배달의 신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배달은 일본 무사시노 벌판에서 일본무도계고수들과 1 대 30의 대결을 펼쳤는데, 그 유명한 무사시노벌판의 일대 30의 대결이 그것이다.

     

    보통 무술고단자와의 대결에서는 일대 일의 싸움에서도 이긴다는 보장을 할 수 없는데, 상대방도 무술고단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최배달이 일본전역을 돌아다니며 도장깨기를 하면서 일본의 내노라하는 고수들을 계속 쓰러뜨리고, 일본최고의 무도가로서 명성을

    떨치자,

    일본무도계에서는 최배달에게 겁을 잔득 집어먹고서, 무도계 전체가 연합해서 최배달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무도계에서는 이번 기회에 최배달을 아예 없애버리고 결정하고, 일본 무도계 각유파에서 최고의 실력자들을 불러모아 일본 무도가연합대표단을 형성하고, 최영의에게 공개적으로 대결제안을 했던 것이다.

     

    최영의 한사람을 잡기 위해서, 일본 가라데계와 유도계, 검도계가 연합해서, 최고의 고단자 30명을 선발해서 최배달에게 도전장을 던졌던 것이다.

     

     

    이 얼마나 비열한 일본인들인가? 일본무도계에서는 가라데명문가 출신 가토 7단을 비롯해서, 가라데실력자 10, 유도우승자 출신 7, 거기다가 검도 고수들 8명등 각무술유파를 대표하는 고단자 26명이 최배달 한사람과 싸우자고 공개대결을 신청한 것이다.

     

    아마 지금의 난나긴다하는 UFC 챔피언 같으면, 대결을 피하거나 도망갔을 것이다. 지금 격투기 실력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알리스타 오브레임이나 케인 벨라스케즈, 스티페 미오치치 같은 격투기헤비급 강자들도 무도계고단자들과 일대 30의 대결을 해보자고 하면, 단번에 거절할 것이다.

     

    최배달과 싸우기로한 일본무도가연합 대표단에는 검객들 8명이 포함되어 있어서, 대결에 응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배달은 이들과 차원이 달랐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그는 우직하리만큼 강직한 성격이었고 명예를 존중하는 성품이었기 때문에, 일본 무도가연합이 제안한 공개대결을 수용했으며, 실제로 약속된 날 싸움장소인 무사시노벌판으로 나갔던 것이다.

     

    약속날, 실제로 대결장소인 무사시노벌판으로 나갔던 최배달이지만, 아무리 강한 최배달이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일본 무도가의 실력자들 30여명을, 그것도 검도고단자 8명까지 포함된 최정예 고단자들을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있는 것이다.

     

    이들 30여명의 고단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실제로 최배달은 약속시간보다 훨씬 늦게 무사시노 벌판으로 나가, 이들을 최대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사시노벌판에는 갈대풀과 숲이 무성했으며, 호수도 있었기에 최배달은 지형지물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싸움전략을 짜두었다.

     

    무사시노벌판의 한쪽끝 수풀속으로 이들 일본무도가연합대표단을 유인했고, 나무와 숲의 좁은 통로로 그들을 유인해서, 정권찌르기와 앞차기, 돌려차기로 선발대 10여명을 삽시간에 무찔렀다.

     

     

    밀본무도가연합 선발대를 물리치자, 적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왔는데, 최영의는 나무와 바위 틈으로 후퇴하는 척하면서, 나무와 바위의 좁은 통로에서 적들과 일대일 싸움을 벌여서 또다시 하나둘씩 적들을 쓰러뜨렸고,

    최배달이 좌충우돌하면서 신출귀몰한 공격을 구사함으로써, 30명의 절반가량을 쓰러뜨리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런데 문제는 갈수록 태산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무도가연합 고단자들을 계속해서 쓰러뜨렸지만, 이번에는 검을 든 검도고수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에, 최배달로서는 더 이상 대결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검을 든 검도고단자 한명과 싸우는 것도 목숨이 위험하지만, 검도 고단자 8명이 그의 앞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최배달은 즉시 무사시노벌판의 왼쪽끝으로 달려갔고, 그곳에는 끝도없이 펼쳐진 갈대밭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왠만한 사람키만큼 큰 갈대들이 수십미터 길이로 길게 뻗어가면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이 갈대밭은 사람이 숨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연못까지 있었다.

     

    최배달은 무성한 갈대밭속에 몸을 숨겼고, 최배달을 뒤쫒아온 무도가연합단원들은 갈대숲을 종횡무진하면서 우왕자왕하고 있었다.

     

    최배달은 갈대숲속을 기어다니면서, 각개약진으로 무도가연합단원들을 기습해서 쓰러뜨렸고, 또다시 갈대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 최배달은 갈대숲을 은폐로 하면서 적들을 치고빠지는 작전을 구사해서, 적들의 진을 빼놓고 있었고, 야금야금 적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이렇게 최배달이 갈대숲에서 치고빠지는 전술로 나오자, 화가 잔뜩 난 무도가연합단원들은 최배달의 은폐장소로 이용되는 갈대숲을 아예 없앨 요량으로, 갈대숲에 불을 놓아버렸고, 갈대숲이 불길에 번져서 점점 갈대숲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뜨거운 불길의 화염이 최배달이 숨어있는 갈대숲쪽으로 밀려왔고, 최배달은 갈대숲 가장자리에 있는 연못속으로 몸을 숨겼다.

    사람키를 상회하는 연못속으로 잠수한 최배달은 마침 구멍이 난 갈대대롱을 입에 물고서, 그 대롱을 물밖으로 노출시켜서 숨을 쉴 수 있었다.

     

    연못주변의 갈대숲이 대부분 불에 타서 없어지고 연못만 덩그런히 남게 되었지만, 잔뜩 성이난 무도가연합단원들은 연못속에 숨은 최영의를 찾지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렇게 일본무도가연합 단원들은 쌍심지를 키고 무사시노벌판의 전역을 샅샅이 뒤지며 다녔지만, 끝내 최배달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

    무도가연합단원들이 우와좌왕하는 사이에 무사시노벌판의 사각지대가 눈에 들어왔고, 최배달은 잽싸게 연못속에서 나와 그 사각지대를 통해서 슬금슬금 무사시노벌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일본무도가의 최정예 실력자들로 구성된 30여명의 일본무도가연합 대표단과의 목숨을 건 대결을 펼쳤던 최배달은 특유의 기지와 전략으로, 그들의 70%를 쓰러뜨리고 그들의 아성에서 빠져나오게 됐다.

     

    그리고 최영의 한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30여명의 무도가들을 내세웠던 이들 무도가연합세력은, 그들의 비겁한 행각으로 인해 여론으로부터 실랄한 비판을 받았으며, 더이상 최배달에게 도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30여명의 일본 최고의 무술고단자집단과의 대결을 피하지 않고, 곳곳하게 맞섰던 최영의의 대담한 기백과 행동은 일본여론으로부터 용기있는 행동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일본에서 최강의 가라데맨으로서 이름을 떨지게 됐다.

       

    검객 료마와의 대결

     

    최배달의 무도업적에서 검귀라는 별명을 가진 검객 료마와의 대결을 결코 빼놓을 수가

    없다.

    최배달이 검귀료마와 대결을 한 것은, 맨손 무술인이 최초로 칼을 가진 상대방과 맞대결을 펼쳤다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펼쳐졌다는 점에서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도대체 사람의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돌아볼 수 있는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리 무술실력이 탁월한 고단자라도 맨손으로 장검을 가진 상대방과 싸워서 이길 수도 없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조그마한 단검(단도)를 가진 상대방과의 싸움에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승산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경우는 단도가 아니라 110cm 길이의 일본도를 가진 검객과 싸웠다는 점이다.

     

    50년대 초반 최배달(최영의)이 한창 일본의 무도계고수들을 쓰러뜨리면서 자신의 명성을 높여나가자, 검도 7단의 고단자 검귀 료마가 혈서로 쓰여진 도전장을 그에게 보내왔다.

     

    결코 최악의 상황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최배달이 검도 7단의 고단자인 료마로부터 도전장을 받았으며, 그는 칼을 가진 상대와의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대결에 당당히 응했다.

     

    아오야마 묘지에서 최배달 대 검객 료마가 서로의 목숨을 걸고 한판승부를 벌여서 화제가 됐다.

    제아무리 탁월한 무도실력을 가진 최배달이라고 하더라도, 칼을 가진 상대와의 싸움에서 한번만 제대로 칼에 찔리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최배달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검객 료마와의 싸움에서도 최영의는 신출귀몰한 무술실력을 발휘해서, 검귀 료마를 물리쳤고, 료마는 최영의의 필살공격에 그대로 사망했다고 한다.

     

     

    일본도를 가진 상대와의 대결에서 모든 사람들은 최배달이 죽을 줄 알았지만, 대결결과 사망한 사람은 최배달이 아니라 검객 료마였다.

     

    검객 료마와의 대결에서 맹렬하게 휘두르는 료마의 날카로운 칼날을 피해가면서, 불굴의 투지로 싸워서 결국 승리를 일궈낸 최배달은 그의 놀라운 담력과 뛰어난 무술실력을 여지없이 증명해 보였다.

     

    이 말도 안되는 칼잡이와의 싸움에서 최배달은 처음부터 난처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빛이 번쩍번쩍 나는 커다란 일본도를 사정없이 휘두르는 료마의 공격에 최배달은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검객의 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료마가 번쩍하는 순간, 그의 예리한 일본도는 최영의의 옆구리를 찌르고 지나갔으며, 그곳에서는 빨간 선혈이 낭자했다.

     

    칼을 사정없이 휘두르는 검객 료마의 예리한 공격에, 맨손뿐인 최영의는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고, 잘못하면 료마의 칼날에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최배달은 주변에 있는 나무와 지형지물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료마의 예리한 칼날공격을 피해다녔다.

    이렇게 주변의 자연 지형지물을 활용하면서, 료마의 칼공격을 피해나갔지만, 그럴수록 료마는 더욱 거세게 칼공격을 해왔으며, 최배달은 이제 언덕을 등지고는 더 이상 피할 데가 없는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됐다.

     

    계속해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 료마의 맹렬한 칼공격에, 결코 물러설 수도 없고, 도망갈 데도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최배달은 마지막 전술을 생각해내었다.

    료마가 마지막 칼공격을 하기위해서 칼을 번쩍 들어올린 순간, 최배달은 그 칼날의 번쩍이는 섬광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전술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료마의 칼공격에 죽을 수밖에 없다, 차라리 죽기보다는 왼쪽팔의 한부분을 절단하도록 그대로 그의 칼을 받는 동시에, 오른쪽 주먹으로 공격해서 그를 쓰러뜨러야겠다이것이 최배달이 절대절명의 순간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해낸 공격전술이었다.

     

    어차피 온전하게 싸워서는 칼을 갈진 검객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즉 최영의는 한쪽팔을 희생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쪽팔로 공격해서 료마의 급소에 치명타를 안겨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최배달이 이런 전술을 생각하는 찰나에, 료마의 날카로운 칼날이 위에서 아래로 날아와서 최배달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료마가 휘두른 칼날이 최배달의 왼쪽어깨에 박히는 순간, 최배달은 자신의 두손으로 합장하면서 칼날을 받았다.

     

    료마의 칼이 그의 왼쪽어깨에 박혔지만, 두손으로 칼날을 받았으므로 충격이 완화되었고, 그 순간을 놓치지않고 최배달은 강력한 오른손주먹을 료마의 명치끝에 그대로 박아넣었다.

     

    왼쪽어깨에 박힌 칼을 최배달이 왼손으로 잡고 있었기에 료마는 칼을 곧바로 빼내지 못하고 있었고, 이 찰나의 순간에 최배달은 료마의 명치 끝에 햄머같은 오른손주먹을 꽂아넣었던 것이다.

     

    이 최배달의 정권찌르기 한방을 정확히 급소에 얻어맞은 료마는 그대로 쓰러졌고, 내장이 파열되어 숨을 거뒀다고 한다. 역대 싸움역사상 가장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최배달과 검귀 료마와의 대결에서, 최배달이 살아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배달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대결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완전 뒤엎고 거꾸로 칼을 가진 료마가 죽어버린 것이다.

     

    검객 료마와의 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함으로써, 최배달은 일본에서 최강의 가라데맨으로서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최배달의 명성은 일본을 넘어서 미국과 주변국가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됐고, 최배달은 1953년도에는 미국으로부터 초대를 받아서, 미국 FBI본부의 무술사범으로 위촉받아서 미국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최배달(최영의)는 미국 레슬링단체의 가라데사범으로 위촉되고 더 큰 활약을 펼쳐나가면서, 미국에서도 큰 명성을 떨치게 된다.

       

    최배달과 중국 진노인과의 대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 최배달과 중국 진노인과의 대결이라고 한다. 최배달의 전적 200전 중에서 최배달이 유일하게 패배한 대결이 진노인과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최배달이 증언하기를, 자신은 진노인과의 싸움에서 결코 지지않았다고 한다.

    단지 최배달은 당시 중국에서 명성이 높았던 태극권의 고수이자, 장풍의 일인자 진노인과의 대결을 원했으며,

    중국으로 그를 찾아가서 대결을 펼쳤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고 무승부를 끝이 났다고 한다.

     

    즉 최배달은 진노인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 아니라, 무승부를 기록한 것인데, 자신의 맹렬한 공격이 먹혀들어가지 않았기에, 스스로 자신이 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역대 싸움에서 최배달(최영의)이 싸운 200전의 대결 가운데, 오직 중국의 진노인과의 대결에서만 승부를 보지못하고 유일한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도 최배달이 생전에 육성으로 증언한 적이 있었다.

     

    진노인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장풍의 일인자로서, 몸의 움직임이 학처럼 부드럽고 유연해서, 최배달이 맹렬하게 공격해 들어가도, 그의 유연한 몸놀림 때문에 타격공격이 무위로 끝나버리게 된다고 한다.

     

    또한 진노인의 장풍의 위력은 보통 사람의 복부내장을 파열시킬 정도로 엄청난 살생력을 지녔다고 한다.

     

    최배달이 계속해서 맹공을 펼치면서 진격해 들어갔지만, 진노인은 단한번의 공격도 맞지않고, 마치 학이 춤을 추는 유연함으로 요리조리 다 피해버렸다고 한다.

     

    결국 최대한의 공격에도 진노인에게 전혀 충격을 주지못하게 되자, 공격하다가 지친 최배달은 자신의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반면 진노인은 최영의에게 단한번의 공격도 가하지 않았다고 하며, 오직 방어동작만 취했다고 한다.

     

    나중에 최배달은 지인에게 오직 방어동작만 취했던 진노인이 만일 강력한 장풍공격을 해왔더라면, 자신이 질 수도 있었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최배달의 말이 와전되어서 마치 최배달이 패배한 것처럼 퍼져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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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남양주시 닭농장 살충제계란에서 피프로닐 검출, 닭 진드기 살충제

       

      일주일 전에 유럽에서 발생해서 큰 공포로 몰아넣었던 살충제 달걀이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해서 큰 충격을 주고 있답니다.

       

      지난주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출하된 달걀에서 살충제 성분인 '피프로닐'

      검출되어서, 유럽전역에 퍼진 살충제 달걀들에 대해 전량 리콜조치가 취해졌을 뿐만아니라, 수십만마리의 닭들을 폐처분하면서 유럽에서는 살충제달걀 때문에 난리가 났었답니다.

       

      그런데 이 살충제달걀 파동은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814일 농림축산식품부가 친환경 산란계 닭사육농장에 대한 잔류농약검사를 벌이던 도중, 경기도의 두 곳 사육농가에서 각각 살충제성분인 피프로닐과 비펜트린이 검출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살충제성분인 피프로닐이 검출된 곳은 경기도의 남양주시의 한 사육농가이고, 비펜트린이 검출된 곳은 경기도의 광주시의 한 사육농가랍니다.

       

      우리나라의 닭사육농가에서도 검출된 두 살충제성분 피프로닐비펜트린은 어떤 물질일까요?

       

       

      비펜트린은 진드기를 잡는데 쓰이는 살충제의 한 종류인데, 미국에서는 이 비펜트린을 발암물질로 분류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피프로닐은 곤충 중에서도 가장 독종인 바퀴벌레나 벼룩을 죽일 때 사용하는 맹독의 살충제성분이라고 합니다.

      피프로닐은 벌레의 중추신경계를 파괴시켜서 죽여버리는 아주 독성이 강한 물질로 사람에게 노출되어서 안되는 물질이랍니다.

       

      더욱이 우리나라 농림식품부에서는 맹독성이 강한 이 피프로닐을 닭사육장에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펜트린은 닭사육농가에서 해충을 죽일 때에 사용하도록 허용하고 있지만, 기준치를 넘어서 과도하게 사용하면 안되는 물질이랍니다.

       

       

      그런데 이번에 경기도 의정부시와 광주시의 산란계 양계장의 달걀에서 검출된 피프로닐의 양과 비펜트린의 양은 기준치를 훨씬 상회하는 양이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피프로닐의 경우 안전함유량은 1kg0.02mg인데 반해,우리나라에서 검출된 양은 0.036mg으로 허용치를 거의 두배 가량 상회하는 함량입니다.

      더욱이 피프로닐은 맹독성이 강해서 정부가 사용금지 품목으로 정했는데도, 이 양계장에서 사용하고 있었답니다.

       

      독성이 너무 강해서, 유럽에서도 전액 환수조치가 일어날 정도로 큰 소동이 벌어졌던 살충제달걀의 그 피프로닐이 우리나라에서도 검출되어서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피프로닐은 사람이 많이 섭취했을 때에는 구토와 설사, 어지럼증의 증세가 나타난다고 하며, 장기간 계속해서 섭취할 경우에는 신경계통에 큰 문제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간이나 신장이 망가진다고 하며 갑상샘도 큰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는 이번에 검출된 피프로닐의 양은 안전기준치를 상회하는 함량이지만,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고 밝혔답니다.

       

      그렇지만 이 피프로닐성분을 계속해서 장기적으로 섭취했을 경우에는, 우리의 건강에 안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답니다.

       

      피프로닐은 곤충 중에서도 일반 살충제로는 죽지않는 아주 독한 벼룩이나 바퀴벌레의 신경을 마비시켜서, 죽일 정도로 맹독성 물질이기 때문에, 장기간 복용시 인체에도 좋지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봅니다.

       

      유럽에서는 이 피프로닐성분이 함유한 달걀 수십만개를 전량 모두 회수조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살충제달걀을 생산했던 어미닭들도 전부 살처분하는 조치를 취했답니다.

      유럽에서는 이렇게 살충제계란을 전량 폐기 또는 살처분하는 상황인데, 우리만 안심놓고 있다면 말이 되질 않습니다.

       

         

      정부에서는 815일부터 3일간 전국의 3,000마리 이상의 닭사육농가를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실시한다고 하며, 그 기간 동안은 닭과 달걀의 판매와 유통을 중단한다고 합니다.

       

      이들 모든 닭사육농가들에 대한 전수조사 실시결과, 합격한 양계장에 대해서만 판매와 출하를 허용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불합격한 닭사육농가들은 당연히 생산과 판매가 금지된다고 합니다.

       

      참고로 전국의 3,000마리 이상의 닭 사육농가는 약 80% 정도라고 합니다.

       

      정부의 이같은 조치에 따라서, 전국에 있는 대형마트와 수퍼마켓에서는 정부의 전수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달걀의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닭 사육장에서 살충제를 사용하는 이유

       

      그렇다면 닭을 사육하는 닭사육농가에서는 왜 이같이 몸에 해로운 살충제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닭을 사육하는 양계장에서는 닭의 몸에 진드기 같은 해충들이 많이 달라붙는다고 하네요. 닭에 진드기가 많이 달라붙어서 닭의 피를 빨아먹어서, 닭이 메말라가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이 달라붙는 진드기 때문에 닭들은 면역력이 떨어지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허약체질로 변하기 때문에, 알을 잘 낳지 못하는 현상이 생긴다고 합니다.

      산란계 양계장에서 키우는 닭들은 모두 알을 생산하기 위한 닭들인데, 닭이 알을 낳지 못한다면 큰 손실이 발생한답니다.

       

      그래서 닭사육장이나 양계장에서는 어느정도 살충제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합니다. 단 살충제를 사용할 때에는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하며, 독성이 강한 피프로닐같은 물질을 사용하지 못하며, 좀 더 약한 살충제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답니다.

       

      닭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난후, 닭사육장에다 살충제를 뿌리는 방식으로 살충처리를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농장주들이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닭의 몸에다 직접 살충제를 뿌리곤 한답니다. 이렇게 해서 살충제성분이 닭의 몸에 노출되게 된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닭의 몸에 살충제를 뿌린다고 해도 닭의 깃털속에 숨어있는 진드기들은 없애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아예 닭의 모이속에 살충제를 뿌려서, 그 모이를 먹는 닭의 체내속으로 살충제성분이 들어가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닭의 혈관속으로 살충제성분이 스며들게 되며, 닭의 몸에 달라붙은 진드기가 닭의 피를 빨아먹을 때에, 그 피속에 함유된 살충제성분으로 인해서 진드기들이 박멸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산란계 양계장들은 대규모의 닭들을 사육하는 공장식 양계장들이 많이 있는데, 한 양계장에서 수천마리에서 수만마리의 닭들을 사육하다 보니까, 일일이 진드기들을 살충처리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아예 닭의 모이속에 살충제성분을 넣어서, 위의 방식으로 진드기들을 퇴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같은 대규모 공장식 닭사육장에 진드기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잘못된 닭사육방식과 사육환경 때문이랍니다.

       

      닭은 원래 땅을 밟고 살아가야 하는 조류랍니다. 땅을 밝고 마음껏 대지위를 활보하면서 생활하는 닭은 몸이나 깃털에 달라붙은 진드기나 해충들을 땅에 몸을 비벼서 사람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제거한답니다.

       

      그런데 지금같은 대규모화된 공장식 닭사육장에서는 대부분의 사육장형태가 다닥다닥 붙은 비좁은 철제울타리로 되어 있어서, 특히 진드기들이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이 되고 있답니다.

       

       

      손 한뼘만한 크기의 좁은 철제우리속에 있는 닭은 몸에 진드기들이 달라붙어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땅이나 모래가 없어서 몸에 달라붙은 진드기나 해충들을 스스로 비벼서 제거할 수가 없답니다.

       

      이렇게 현대판 공장식 철제 닭사육장은 닭이 스스로 몸에 달라붙은 해충들을 제거할 수 없는 환경으로 되어있어서, 진드기들이 더욱 더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며,

      이런 최적의 환경에 진드기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닭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렇기에 닭사육 농장주들은 엄청 늘어난 진드기들을 좀더 손쉽게 퇴치하기 위해서, 닭의 모이속에 살충제들을 넣는 꽁수를 부리는 방식으로 진드기들을 없애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랍니다.

       

      이렇게 닭의 모이를 통해서 살충제성분을 먹은 그 닭들이 낳은 댤걀들도 자연스럽게 살충제성분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랍니다. 이렇게해서 살충제달걀이 탄생하게 된 것이랍니다.

       

      , 살충제 계란은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농장주들이 꼼수를 부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닭에 진드기 같은 해충이 늘어난 이유는 닭들을 땅위에서 키우지 않고, 아파트식 철제 우리속에서 키우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랍니다.

      그리고 그 늘어난 진드기들을 손쉽게 없애기 위해서, 농장주들이 살충제들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결국은 지금같은 살충제달걀 파동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적은 노력과 비용으로 큰돈을 벌어보려는 닭사육 농장주들의 지나친 탐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농장주들은 자신들이 잘못된 닭사육 환경을 만들어놓아서 발생한 해충들을 손쉽게 제거하기 위해서, 해로운 살충제들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등 살충제남용으로 인해서 이같은 살충제달걀대란이 발생한 것이랍니다 

       

      살충제달걀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

       

      살충제달걀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철제식 닭우리환경을 점차적으로 없애고, 닭들을 철제우리가 아닌 땅위에서 키우는 자연친화적 닭우리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이것이 닭의 해충들을 줄이고 닭의 스트레스를 막아서, 더이상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건강하고, 자생력이 강한 닭들을 산출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랍니다.

       

      이와같은 근본적인 처방 없이 단지 눈앞에 보이는 단기적 처방만 같고는 대량의 진드기의 발생과 과도한 살충제 사용의 악순환은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먹거리문제는 우리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분야랍니다.

       

      정부에서 갖고 있는 예산을 엉뚱한 데에 낭비하지 말고, 공장직 철제우리식 닭사육농가들을 자연친화적 사육농가로 개조하는 데에 지원금으로 제공해서, 점차적으로 우리나라의 수많은 잘못된 공장직 닭사육장들을 자연친화적 사육장으로 바꿔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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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민비 시해사건, 살해이유와 초상화, 을미사변

         

        민비라는 칭호로 알려진 명성황후는 조선의 26대왕 고종의 왕비로서, 조선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비라고 할 수 있다.

         

        명성황후 민씨가 명성을 크게 떨친 이유는 두가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조선의 왕비 중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렸던 왕비이기 때문이며, 또다른 하나는 일본인들에게 비참하게 참살당한 국모라는 이유 때문이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의 정비로서, 고종과 정사를 함께 상의하며 정사를 공동운영했던 왕비로서, 어떻게보면 고종과 권력을 양분했던 조선권력의 실권자였다.

         

        조선의 그 어떤 왕비도 명성황후처럼 권력의 최고정점에서 왕 못지않은 최고권력을 휘둘렀던 왕비는 없을 것이며, 당시 조선에 파견되었던 외국 공사들도 고종보다는 오히려 명성황후를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인물로 주목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명성황후는 구한말 어려웠던 시절에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위해서 노력했던 총명한 왕비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에,

        명성황후는 민씨 친정세력을 끌어들이고 사치를 일삼고 국정을 농단함으로써, 결국 조선의 멸망을 앞당겼던 왕비라고 하는 평가가 그것이다.

         

         

        명성황후 민비가 현명한 왕비인지, 어리석은 왕비인지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그녀가 왕비가 되었을 시기에는 조선의 국력이 너무나도 열악해져 있었고,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이 너무나도 강한 국가로 커져 있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는 1860년대초부터 1870년대 초까지 권력을 장악해서 왕보다 더한 권력을 행사했던 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는 영특한 왕비라고 할 수 있다.

        대원군은 고종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 고종이 어리다는 핑계로 자신이 직접 10년 동안 섭정을 행사해오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다.

         

        나약했던 고종은 스스로 아버지인 대원군을 몰아낼 힘이 없었기에, 이때에 왕비인 명성왕후가 나서서 최익현이 상소를 올리도록 유도해서, 대원군을 축출하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확립해주는 데 큰공을 세웠다.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초상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대원군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만들어주었던 점에서, 명성왕후의 총명과 공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명성왕후의 결단과 책략이 없었다면, 어쩌면 대원군은 영원히 권력을 놓지않고 고종을 허수아비왕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1873년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상소로 인해서, 대원군의 10년 권력은 끝이 나고, 고종이 직접 통치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국정을 직접 운영해나갈 수 있게 됐다.

         

        고종의 친정체제를 확립한 후에, 명성황후 민비는 의붓오빠인 민경호 등 민씨 친정세력들을 권력의 중심으로 대거 끌여들이면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후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폐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고, 일본과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들과 국교를 수교하면서 나름대로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명성황후가 집권한 시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녀의 개혁정치는 한계에 부닥칠 수 밖에 없었다.

         

        구 대원군의 기존 잔존새력의 견제, 조선의 국권침탈을 노리는 일본의 공작과 서구열강들의 조선정치 관여 등 일본과 외국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위태위태하게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고종과 명성황후는 제대로된 개혁정치를 펴나갈 수가 없었고, 시행착오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이것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개혁정치의 발목을 잡는 방해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일본의 침략야욕과 동학혁명 등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듯이 어렵게 국정을 운영해났다.

         

         

         

        명성황후 민비 시해사건 (을미사변)

         

        동학농민 혁명이 삼남지방에서 거세게 일어나자, 고종과 민비는 농민반란에 두려움을 느끼고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한다.

         

        청나라군사가 조선에 파견되자 일본도 함께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는데, 결국 한반도에서 동북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청나라군과 일본군간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두나라간 전쟁에서 일본군이 연승을 하면서, 청군은 패퇴하여 조선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승리한 일본군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하면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해나간다.

         

        그런데 명성황후는 청일전쟁 승리 후, 노골적으로 침략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더욱 밀착한 외교를 전개해 나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국력이 더욱 커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게되자, 일본은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계획을 만들게 된다.

         

        이로 인해서 1895년도에 을미사변이라는 조선 국모시해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895108일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불행하고 치욕스러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왕비이자 국모가 일본의 낭인(깡패)들에게 무참히 척살당하고 능욕까지 당했던 조선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가장 끔찍하고 참혹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조선의 국모이자 왕비인 명성황후의 제거를 시도했던 것인가?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했던 1895년도의 한반도의 국제정세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후, 일본은 군대를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는 등 일본의 침략의 야욕이 본격화되자,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날로 힘이 커지고 조선애 대한 간섭을 노골화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당시 동북아에서 정치적 역량이 컸던 강대국 러시아의 힘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이제이,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또다른 오랑캐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으로, 당시 정치적 식견과 책략에 뛰어났던 명성황후는 날로 강성해지고 있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

        해서,

        동북아의 또다른 강국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기로 하고, 러시아의 베베르공사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러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해나갔다.

         

        이처럼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러시아와 밀접하게 연대해나가자, 일본은 조선정치의 정점에서 멀어져가는 소외감을 느끼게 됐다.

         

        조선과 러시아의 밀월관계가 더욱 강화되어 나가자, 일본은 명성황후가 자신들을 고의적으로 배제한다고 판단했고,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에 가장 큰 방해요소로 명성황후로 지목하고, 그녀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러니까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킨 표면적인 이유는 명성황후의 친러시아정책이라고 할 수 있고, 보다 더 큰 근본이유는 조선을 침탈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명성황후가 러시아등 강대국들을 끌어들여서,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1895108일 일본은 일본낭인들을 동원해서 경복궁에 난입해들어가서, 건청궁에 있는 명성황후를 칼로 시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불로 화형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당시 조선에 파견온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진두지휘했던 사건이었다. 육군대령 출신인 미우라는 원래 정치인출신이 아니라,

        일본군에서도 강경파에 속하는 우직한 성격의 군인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아주 적합한 인물로 낙점받았다.

         

         

        그리고 미우라 공사에게 지휘를 내렸던 인물은 바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였고, ,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정부가 기획해서 지시를 내린 사건으로, 조선에 있는 미우라 공사의 진두지휘를 받았던 40명의 일본낭인들이 실행에 옮겼던 사건이다.

         

        1895108일 새벽 5시경, 일본공사 미우라가 경복궁 앞에서 진두지휘한 상태에서, 일본군 2개 대대가 경복궁의 두 개 대문을 공격했다.

         

        당시 경복궁을 수비하던 조선의 수비병들은 갑자기 쳐들어온 일본군대의 공격을 방어해내지 못하고 패퇴하였고, 15분만에 성문이 열리게 된다.

        당시 일본군과 내통했던 조선의 일부 시위대는 싸우지도 않고 일본군 침입을 묵인했다는 설도 있다.

         

        그렇지만 홍계훈 경비대장 같은 수비군들은 일본낭인들의 침입을 막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서 전사했다고 한다.

         

        경복궁의 궐문을 열고 조선수비대 군사들을 물리친 일본낭인들 40여명이 궁궐안으로 침투해 들어갔으며,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의 옥호루로 가서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된다.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의 옥호루

         

        40명의 일본낭인들이 건청궁의 옥호루에 쳐들어가서 명성황후를 찾았지만, 궁녀복으로 변장을 한 명성황후를 찾지 못하게 되자, 궁녀 두명을 옥후루 밖으로 던져 죽이자, 이것을 본 명성황후가 복도로 달려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달아나는 명성황후를 뒤따라왔던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넘어뜨리고 발로 짓밟고 난후, 일본도로 복부와과 옆구리를 세 번 찔러서 살해했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후, 일본낭인들은 그녀의 시신을 건청궁의 동쪽 바깥으로 끌어내서 휘발유를 끼얹고 화형시켜 버렸다고 한다. 이때가 명성황후의 나이 45세로 아직 젊고 창창한 나이였다.

         

        궁궐에 난입했던 일본낭인들은 고종의 처소에도 침입하여, 고종을 압박하여 명성황후의 폐비조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거부하는 고종의 옷자락을 찟어버리고, 세자에게도 칼을 휘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살해한 후에 일본은 처음에는 일본의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명성황후를 살해했던 일본낭인들에게 조선훈련대의 복장을 입히고 침투시켰기 때문에, 일본은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조선훈련대가 공모해서 살해했다는 거짓된 변명으로 일관했다.

         

        실제로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계획을 세운 후에, 일본공사관에서 대원군을 회유해서 포섭했다고 한다.

        일본공사관은 나라를 좀먹는 명성황후를 없애고난 후에, 대원군을 다시 국정의 최고책임자의 자리로 복귀시켜주겠다는 말로 대원군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여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과연 대원군이 자신의 의지로 명성황후 시해하는 일에 가담했을까? 절대로 아닐 것이다.

         

        당시 이미 권력의 정점에서 멀어져서 힘이 전혀 없었던 대원군은 일본공사관의 협박과 회유에 못이겨서, 어쩔 수 없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름을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 어떤 시아버지가 다 늙은 나이에 무슨 덕을 보려고, 며느리를 죽이고 아들의 권력을 빼앗으려고 하겠는가?

         

        아뭏튼 1895년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일본낭인들의 칼부림을 맞고, 처참하게 척살당했다. 일설에는 명성황후를 죽이고 난후, 일본낭인들이 명성황후의 죽은 시신에 윤간을 했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일본의 '에조 보고서'를 보면, 일본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집단으로 윤간과 시간을 자행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명성황후가 죽고 난 후에, 일본은 더욱 득의양양해져서 친일파 김홍집내각을 이용해서, 일본에 유리하도록 체제를 바꾸는 을미개혁을 단행하고, 고종은 완전 허수아비왕으로 전락하고 만다.

         

        일본인고문들이 조선 조정의 모든 부서에 배치되어서, 일본의 조선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조종을 받은 김홍집내각은 고종을 압박해서 죽은 명성황후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시키는 조치를 실시한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난 후에, 친일파들을 내세워서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강등시킴으로써 명성황후를 두 번 죽이는 만행을 자행한다.

         

        이같은 부당한 조치에 세자가 나서서 황후 페위조치를 거둬달라고 강력히 반발하자, 고종은 명성황후를 후궁격인 빈으로 다시 승격시켜주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죽이는 잔학스러운 행동을 하자,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되어 나간다.

         

        일본은 처음에는 명성황후를 죽인 것이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발뺌을 했지만, 베베르 러시아공사가 증인들을 찾아내는 등 치밀한 조사활동을 벌여서, 일본공사가 명성황후의 시해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러시아를 비롯한 프랑스, 독일 등 열강들이 강력하게 일본에 항의를 하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명성황후를 살해했던 미우라공사 등 일본낭인들을 일본의 히로시마법정에 세워서 재판을 진행했다.

         

        그렇지만 이 히로시마재판은 서구 열강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실시한 형식적인 재판에 불과했고, 구속되었던 40명의 낭인들은 사건이 잠잠해진 1년 뒤에 모두 다 석방되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일본낭인들은 자신들이 조선의 왕비를 살해했다고 술자리에서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낭인들

         

        한나라의 왕비를 처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에 대해서 엄청난 분노감이 치밀어 오른다. 다시는 이같은 치욕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교훈을 절대로 잊지말아야 한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언제든지 주변국가들은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는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강할 때만이 국가의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것이고, 평화도 확보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라의 주권과 평화는 강한 국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명성황후의 초상화와 사진

         

        814일날 종로구 다보성갤러리는 광복 72주년을 맞아 전개한 특별전시회에서 () 명성황후 초상을 공개했다.

        다보성갤러리는 이날 명성황후의 새로운 초상화를 공개한 것인데, 이 초상화는 명성황후가 평상복을 입고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큰 주목을 끌었다.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이 새롭게 소개한 명성황후 초상화

         

        이번에 공개한 명성황후의 초상화는 명성황후가 두손을 모은 상태로 의자에 앉은 체 하얀빛깔의 평상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고, 머리에는 하얀 두건을 쓰고 있다.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은 이 명성황후 초상화는 운현궁에서 출토된 것으로, 여러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자신에게 들어왔다고 그 출처를 밝혔다.

         

        현재 이 초상화 뒷면에는 부인초상이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는데, 원래 부인초상위쪽에 閔氏(민씨)’라는 글씨가 있었다가 지워졌다고 한다.

         

        김관장은 원래 명성황후를 뜻하는 閔氏(민씨)’라는 글자가 있었었다는 점과 이 여인이 고급 가죽신발을 신고있다는 점,

        이승만 전대통령이 집필했던 책 독립정신의 명성황후의 사진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서 이 초상화가 명성황후의 실제 초상화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은 이 초상화가 명성황후의 초상화일 것으로 거의 확신하고 있지만, 이 초상화를 본 일부 교수들은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초상화의 옷차림이나 용모가 왕비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초라하다는 것을 들어서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아닐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 이 그림이 명성황후의 초상화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과연 이 초상화가 명성황후의 진짜 초상화인지는 우리학계에서 보다 면밀한 조사를 벌여야 판별이 날 것 같다.

        아직은 김관장의 말만 듣고서 이 그림을 명성황후의 진짜 초상화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과거부터 명성황후의 초상화는 여러장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아래 첫번째 사진은 대한제국 멸망사에 나왔던 명성황후 사진으로서 가장 일반에 많이 알려져왔던 명성황후 사진이다. 그렇지만 이 사진은 1890년대 초반부터 민간에 궁녀의 사진으로 나돌았던 사진이라고 해서, 명성황후의 실제 사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두 번째로 아래사진은 외국에 살해당한 왕비라는 제목으로 나돌았던 사진으로서,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알려졌었는데,

        이 사진이 1894년 발간된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그냥 궁녀의 사진으로 소개되고 있어서, 이 사진 역시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아래 사진은 이승만이 집필했던 책 독립정신에 수록된 사진으로 사진의 주인공을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직접 지목되었던 사진이라고 한다.

        이 사진은 일제시대때부터 1980년도까지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소개되었던 사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진도 실제 명성황후 시절에 궁궐에서 일했던 궁녀출신 여성들에게 문의해본 결과, 실제 명성황후와 다른 사람이라는 답변을 얻었다고 한다.

         

         

        결국 우리에게 여태까지 알려진 명성황후의 세가지의 사진은 모두 실제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다보성갤러리의 김종춘관장이 전시한 명성황후 그림이 혹시 진짜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아닐까 하는 더 큰 기대감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김관장도 이그림을 자신에게 건네준 그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어서 아직 진정한 명성황후의 초상화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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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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