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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청순미인 배우 한혜숙 젊은시절 모습, 근황 미혼인 이유

     

    한혜숙은 70년대 우리 안방극장의 드라마에서 세련되고 청순한 미모로 큰 인기를 끌었던 여배우랍니다.

     

    70년대 한창 TV드라마가 인기를 끌 시기에, 한혜숙은 드라마 꿈나무로 연기자로 데뷔해서 하명중과 함께 청순한 미모로 명품연기를 펼쳐서 많은 팬덤을 형성했던 70년대의 미녀스타랍니다.

     

    한혜숙은 70년대에 드라마 꿈나무춘향전에 주연으로 출연해서 장래가 총망되는 유망한 신인으로 스포트라이터를 한몸에 받았답니다.

     

    70년대 초반 당시 한혜숙은 김자옥과 김영애와 함께 안방극장의 트로이카를 형성하면서, 여러펀의 TV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높은 인기를 끌게 된답니다.

     

    한혜숙은 꿈나무에 여주인공 모집하는 오디션에 참가한 것이 처음 연기자로 데뷔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당시 꿈나무오디션의 경쟁률이 무려 3500:1이었다고 하네요.

     

     

     

    , 참신성과 청순미를 중시하는 꿈나무여주인공 오디션에 참가한 한혜숙은

    3500: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1위를 하여, 드라마 꿈나무의 타이틀롤을 맡았다고 합

    니다. 

    이처럼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뽑힌 것은, 당시 제작진이 한혜숙의 미모와 장래 발전가능성을 높이 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혜숙은 1971년도에 자신의 소속인 MBC에서 현 KBS로 이적하였는데, 그 이유는 드라마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이에 응모하기 위해서였답니다.

     

    한혜숙이 71년도에 KBS TV 10기생에 응모해서 또다시 어려운 관문을 뚫고 수석으로 합격했으며, 드디어 대망의 춘향전의 주인공 자리를 꽤차게 된답니다.

     

     

    한혜숙이 다른 탤런트와 다른 점은 MBCKBS 같은 처음 방송국에 데뷔했을 때에 단역과 조연자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던 점인데요.

      대부분의 탤런트들이 처음에는 단역이나 조연을 맡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한혜숙은 처음 데뷔작부터 주인공자리를 얻어 연기를 시작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MBC에 입사하자마자 꿈나무에서 여주인공역할을, 그리고 KBS로 이적하자마자 춘향전의 여주인공역할을 맡는 등, 이렇게 한혜숙은 데뷔할 때부터 주인공으로 스포트라이터를 받는 등 화려한 연기생활을 시작했답니다.

     

    그것은 한혜숙이 70년대 전반 당시 늘씬한 몸매에 서구적이면서 세련된 미모와 함께 청순미가 짙게 풍기는 그녀의 미모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참고로 한혜숙의 키는 164cm로 평균키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던 70년대 초반에 이 정도의 키는 상당히 큰 키에 해당하지요.

    당시 라이벌이었던 김자옥과 김영애보다 한혜숙이 한뼘 정도 키가 더 크고 늘씬해서, 더욱 세련되게 보였답니다.

     

     

    한혜숙은 그후 다양한 장르의 여러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 연기생활을 활발하게 전개해나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또한 한혜숙은 청순하면서도 세련된 미모 덕분에, 각종 CF모델로 많이 발탁이 되는데, 특히 당시 가장 인기좋았던 화장품 아모레 하이톤화장품의 전속모델로 스카웃되어 활동했답니다.

     

    여자연기자들의 최고의 로망은 바로 화장품 CF광고를 찍는 것인데, 한혜숙은 데뷔한 초창기인 71~73년도에 아모레 하이톤화장품 광고를 찍으면서 자신의 미모와 인지도를 크게 높여놓았답니다.

       

    훗날 유지인, 이영애, 채시라, 김희애가 톱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이 데뷔 초반부에 모두 화장품광고를 찍으면서 자신들의 인지도를 크게 높였기 때문이랍니다. 그만큼 여배우들의 화장품 CF광고는 톱스타로 가는 관문이나 다름 없지요.

     

      20대때 한혜숙의 청초한 모습 사진

     

    한혜숙도 톱스타로 가는 관문인 화장품 광고를 찍으면서, 자신의 인지도를 크게 높여놓았답니다. 아마도 한혜숙이 화장품 CF광고 1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혜숙은 화장품광고 뿐만아니라, 섬유회사 이불광고, 비바라 샴푸광고, 빠이롯트 만년필광고 등 70년대 후반까지 수많은 TV광고를 찍었는데, 그야말로 70년대 광고의 여왕 노릇을 하였답니다.

     

    70년대 전반기까지는 한혜숙의 미모가 여자탤런트 중에서 단연 톱이라고 할 수 있구요. 이 정도 인물이 받쳐주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TV광고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한혜숙은 70~80년대에 여러편의 드라마와 영화들에 출연해서, 활발한 연기활동을 벌여나갔답니다.

     

    70년대 한창 인기 좋았던 꿈나무’ ‘춘향전’ ‘꽃피는 팔도강산’ ‘토지’ ‘구미호등의 수많은 인기 드라마와

    족보’ ‘상록수’ ‘최후의 증인’ ‘두여자의 집등의 여러편의 영화들에 출연하여 큰 인기를 끌면서, 70, 80년대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모의 여배우로 급부상한답니다.

     

     

    그리고 한혜숙은 80년대 후반 약간의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90년대와 2000년대도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하여, 다시 왕성한 연기활동을 이어나간답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한혜숙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녀가 맡은 배역은 중년의 어머니역할들을 많이 맡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대섭리 때문이지요.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 ‘하늘이시여’ ‘보석비빔밥등의 인기드라마에 출연해서 기품있고 원숙한 명품연기로, 드라마의 인기를 크게 끌어올리는 견인차역할을 다 하지요.

     

    특히 드라마 하늘이시여에서 한혜숙은 개성있고 인상적인 명품연기를 펼쳐서, SBS 연기 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타내는 쾌거를 이룬답니다.

     

     

    한혜숙은 70~80년대에는 청순한 미모와 풋풋한 여성미로 인기를 끌었다면, 중년의 나이가 된 2000년대에는 원숙하고 개성있는 명품연기력으로 또다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한혜숙이 결혼을 안한 이유

     

    70년대에 3500:1의 경쟁률에서 1위를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아모레 화장품광고에 발탁될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갖고, 탤런트로서 명성을 높였던 한혜숙이 결혼을 아직까지 안했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미모를 가진 한혜숙이 결혼을 안했다는 사실자체가 매우 놀랍기만 한데요.

     

    미모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인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70,80년대에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탤런트로서 다섯손가락 안에 꼽혔던 한혜숙이 결혼을 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혜숙이 결혼을 안한 이유를 알려면, 먼저 그녀의 집안환경과 종교를 살펴보야 한답니다.

     

     

    한혜숙은 1951년도에 부산에서 출생했으며, 사업을 하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엄친딸로 성장하였답니다.

    그리고 한혜숙은 밑으로 여동생이 4명이 있는 장녀로서, 한혜숙이 20대의 나이에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셔서, 사실상 한 집안의 가장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가정에서 한혜숙은 밑으로 4명의 동생들을 양육해야하는 사실상 가장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답니다.

    서울에서 덕성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한혜숙은 자신이 많은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일찍 산업전선에 나서게 되는데요.

     

    여고를 졸업하고 난 이듬해에, 한혜숙은 MBC에서 개최하는 드라마 꿈나무여주인공 모집 오디션에 응모해서, 수천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여 연기자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연기자활동을 하면서도 4명의 동생들의 학비를 부담하는 등 가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나갔답니다.

     

    한혜숙은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불고신자인 어머니를 따라 자주 절에 다니면서 불공을 드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절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불공을 들이면서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하며,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불교와의 친숙한 인연으로 장성한 후, 한혜숙은 독실한 불교신자가 된답니다.

     

     

    한혜숙은 수십년간의 연예계생활을 해오면서도 스캔들이 거의 없었던 연예인으로 유명한데, 이것은 한혜숙의 종교적인 신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혜숙은 오랫동안 불공을 들이면서 자신을 보다 더 엄격하게, 철저하고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한혜숙의 타고난 성품자체가 깐깐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완벽제일주의자였기에, 자신을 흐트러짐 없이 관리해왔다고 합니다.

     

    그럼 아모레화장품의 광고모델로 발탁되었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갖고있었던 한혜숙이 결혼을 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스파르타교육, 불교적 금욕주의적 가치관과 신념, 완벽제일주의 성격 이런 요인들이 상호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한혜숙이 남자를 멀리하고, 혼자서 미혼으로 살아오게된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불교인으로서 불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고, 금욕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엄격한 성격이 한혜숙으로 하여금 주변에 접근하는 남자들을 멀리하게 만들고,

    이러한 습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아오게된 것이 아닐까 사료된답니다.

     

    실제로 한혜숙은 방송에 출연해서, 만약 자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비구니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답니다. 이 말이야말로 한혜숙이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아오게된 그녀의 성품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 말이라고 봅니다.

     

    그녀의 종교적 가치관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답니다.

     

    또한 한혜숙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혼자서 4명의 여동생들을 대학까지 보내고 학비를 부담하는 등 동생들 양육에 헌신했답니다.

    많은 동생들을 양육하는 데에 몰두하는 바람에, 혼기를 놓친 것도 그녀가 독신으로 살게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답니다.

     

    실제로 한혜숙은 8029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였을 때, 4명의 동생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혜숙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4명의 동생들의 학비를 다 대고 양육시켜고, 전부 결혼까지 시켜주었다고 하며, 이렇게 많은 동생들을 양육하느라고, 정작 자신은 연애를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 집안의 경제를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한혜숙은 결혼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희생했던 것은 아닐까요?

     

    또한 한혜숙은 살아가면서 종교에 더 깊숙이 빠져들었고, 땅을 구입해서 미국 샌디에이고에 절을 짓는 데에 자신의 땅을 기부하기도 합니다.

      만약 연기자가 되지 않았다면, 비구니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 할 정도로 그녀의 불교에 대한 신념은 엄청나답니다.

     

    그런데 한혜숙은 연예계생활을 하면서, 여러군데서 유혹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한혜숙은 마음속 한켠에 항상 비구니가 되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자신을 더욱더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마음속의 목표는 유명한 연예인이나 스타가 아니라, 불심이 두터운 불자로서의 삶이라고 하며, 이러한 그녀의 탄탄한 불심이 그녀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었다고 하네요.

     

    한혜숙은 자신이 죽기 전에 암자를 하나 지어서 보시하고 싶다고 하며, 그곳에 복지시설을 만들어서,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답니다.

       

    그런데 사실 한혜숙도 한때는 박정희와 관련된 루머나 정주영과의 루머도 나돌기도 했답

    니다.

    물론 이같은 루머들은 모두 확인되지 않은 가십성 루머들로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지요.

     

    박정희의 서슬이 퍼럿던 시절에, 엄청난 공포독재정치를 펼쳤던 박정희가 70년대 잘 나가던 여배우들을 많이 건드렸다고 합니다.

    궁정동의 안가는 박정희가 여배우들을 거의 강제로 데려다가 유희를 즐기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랍니다.

     

     

    그런데 박정희가 하두 많은 여자들을 건드렸기 때문에, 아무 관련없는 여배우들도 도매급으로 함께 연관되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합니다.

     

    총과 권력의 힘으로 힘없는 여자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성의 노리개로 삼는 파렴치한 일들이 그 시대에는 실제로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제는 우리사회도 많이 성숙해지고 발전했으니, 다시는 그런 불행한 일들이 발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혜숙은 올해 나이가 67이지만, 아직도 동안의 외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곱게 아름답게 늙어가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랍니다.

     

    한혜숙은 원래 독신주의자는 아니라고 하며, 한 방송에서 아직도 언젠가는 좋은 남성과 만나 결혼하는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답니다.

     

     

    2009년 드라마 '보석비빔밥' 출연 이후, 방송에서 모습을 보이지않고 있는 한혜숙은 집에서 병으로 편찮으신 어머니를 돌보면서 쉬고 있다고 합니다.

    한혜숙이 하루 빨리 방송에 출연해서, 기품있고 원숙한 모습 더 많이 보여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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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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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중량급의 강타자 박종팔, 서덜랜드 경기 슈퍼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전

       

      박종팔 전적 - 46(39KO) 52, 나이 1958년생

      머레이 서덜랜드 전적 - 49(40KO) 131

       

      박종팔선수는 80년대 대단한 강펀치로 미들급 등 중량급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던 선수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프로복싱이 침체되어 있는 상태지만, 8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프로복싱은 스포츠종목 중 가장 인기가 좋았던 스포츠였다.

       

      프로복싱에서도 특히 70kg가 넘는 육중한 체구를 자랑하는 미들급 같은 중량급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80년대 한국 프로복싱 중량급에서 최고의 스타가 바로 박종팔선수였다.

       

      사실 80년대에 아시아에서 미들급은 아시아의 헤비급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가장 큰 체급에 속했는데, 키가 크고 덩치가 큰 거구들이 싸우는 미들급경기는 복싱팬들로부터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인가만점의 스포츠였고, 그 높은 인기의 한복판에 박종팔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박종팔선수가 80년대 한국 프로복싱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이유는 육중한 체구에서 뿜어져나오는 무시무시한 강펀치와 왠만한 상대들을 KO로 쓰러뜨리는 화끈한 경기스타일 때문이다.

       

       

      박종팔선수가 80년대에 이룩한 복싱기록들을 보더라도 그는 거의 미들급의 국보급 선수라고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박종팔선수는 1979년도에 동양미들급 챔피언자리에 올라 15차례나 타이틀방어에 성공했고, 1984년도에는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이 되어서 8차례나 타이틀을 지켜냈으며,

      또한 1987년도에는 대망의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타이틀을 차지하는 등 우리나라 중량급 프로복싱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수였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선수로서 중량급에서 세계타이틀을 8차례나 방어에 성공했던 선수는 박종팔선수가 유일하고, 우리나라 선수로서는 중량급 세계타이틀을 최다방어에 성공한 기록을 세웠다.

       

       

      이런 점에서 박종팔선수는 중량급선수로서 역대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박종팔은 한국출신 중량급 세계챔피언으로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던 다른 선수들과 확연하게 구별된다.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이었던 김기수선수는 타이틀 2차 방어까지만 성공했고, 슈퍼미들급 챔피언이었던 백인철은 타이틀 1차 방어에만 성공했을 뿐,

      70년대의 유망주였던 유제두선수도 주니어미들급 타이틀을 1차 방어만 성공했을 뿐이다.

       

      , 주니어미들급 이상의 중량급에서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박종팔 이외의 선수들이 최다방어한 것이 고작 2차 방어에 불과한데, 이 기록을 깨고 박종팔이 유일하게 8차 방어에 성공하는 수훈을 세운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중량급의 세계타이틀 8차 방어 성공의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 이시간 이후로 과연 우리나라에서 주니어미들급이나 미들급 이상의 체급에서 세계 챔피언이 나올지도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2010년도 이후 우리나라의 프로복싱은 단 한명의 세계챔피언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지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80년대 세계수퍼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두 번이나 차지했던 박종팔선수가 위대하다는 것이다.

       

      전성기때의 박종팔선수는 엄청난 강펀치와 폭발적인 타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가 한번 대쉬해들어가서 햄머같은 양훅 콤비블로우를 휘두르면 왠만한 상대선수들을 한 두방만 맞아도 그대로 KO되고 만다.

       

      박종팔선수의 레프트훅에 이은 라이트어퍼컷 콤비블로우는 말 그대로 황금같은 타격기술이었는데, 이 콤비블로우에 얻어맞은 선수들은 그대로 KO되거나, 들 것에 실려나가기 일쑤였다.

       

      박종팔은 전성기때에 18연속 KO승 행진을 이어갔던 기록을 보더라도, 그가 왜 한국 중량급을 대표하는 강펀치의 소유자인지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 박종팔은 햄머같은 강펀치를 휘두르면서, 불도저 같은 저돌적인 러싱파이팅으로 만나는 상대선수들을 모두 KO로 무너뜨리면서, 동양타이틀을 15차례나 방어해내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더 이상 아시아에서 적수를 찾지못한 박종팔은 세계타이틀에의 도전을 물색하게 되는데, 그당시 세계미들급 챔피언은 역대 최강의 챔피언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는 마빈 헤글러였다.

       

      그리고 박종팔은 마빈 헤글러에 도전하기 위한 도전자결정전에 나서는데, 그 대전에서 만난 상대가 베네주엘라의 풀헨시오 오벨메이야스였다.

      당시 262626KO승의 100% KO율을 자랑하던 KO머신 오벨메이야스에게 박종팔은 안타깝게도 8KO패를 당하면서, 마빈 헤글러에의 도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박종팔이 오벨 메이야스에게 패배한 것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박종팔은 심기일전해서 1984년도에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인 머레이 서덜랜드에 도전하여,

      11라운드에 통쾌한 역전 KO승을 거두고,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박종팔은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이 된 이후로, 무려 8차례나 타이틀방어에 성공했고, 87년도에 챔피언타이틀을 반납하고 또다른 도전에 나서는데,

      바로 WBA 슈퍼미들급 타이틀에 도전해서 멕시코의 강타자 헤수스 가야르도를 2라운드에 KO로 무너뜨리고, 두번째 세계챔피언벨트를 획득한다.

       

      사실 중량급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세계챔피언타이틀을 두 번이나 차지했던 사람은 박종팔이 유일하다.

       

       

      박종팔은 WBA 슈퍼미들급 타이틀을 2차 방어전에서 애석하게도 숙적 풀헨시우 오벨메이야스에게 패배해 넘겨주고 만다.

       

      박종팔이 비록 WBA 슈퍼미들급 타이틀은 빨리 잃어버렸지만, IBF 슈퍼미들급 타이틀은 8차례 방어에 성공하는 등, 롱런을 달성해서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 당시 박종팔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았었다.

       

      저돌적으로 파고들어가서, 만나는 상대선수들마다 엄청난 강펀치를 휘둘러대며, KO로 고꾸라뜨리는 박종팔의 박력 넘치는 파이팅에 세계의 복싱팬들이 열광했었다고 한다.

       

      80년대의 박종팔의 명경기는 박종팔에게 챔피언밸트를 안겨줬던 머레이 서덜랜드와의 IBF 슈퍼미들급타이틀전 경기라고 할 수 있다.

       

      1984722일 서울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챔피언 머레이 서덜랜드를 불러다 타이틀전을 치렀는데, 이 경기에서 박종팔은 2회전에 서덜랜드의 강력한 라이트스트레이트를 얻어맞고 다운까지 당했지만,

      그 후 특유의 근성과 뚝심을 발휘해서 머레이 서덜랜드를 탱크처러 몰아붙이고 두들겨팬 끝에, 11라운드에 통쾌한 역전 KO승을 거두고,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한다.

       

      이 경기는 80년대 우리나라 중량급의 최고의 명승부로 알려진 경기로서, 박종팔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경기라고 할 수 있다.

       

      박종팔과 부인 이정희 사진

       

      박종팔은 2라운드에 머레이 서덜랜드의 강펀치를 턱에 얻어맞고 다운을 당하면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경기 초반 4라운드까지 키가 크고 리치가 긴 머레이 서덜랜드가 빠르고 강력한 스트레이트펀치를 날려서 박종팔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수세에 몰린 분위기이다.

       

      그런데 중반전 이후 박종팔의 폭팔적인 파이팅이 서서히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박종팔은 서덜랜드의 약점인 복부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키가 큰 선수가 복부가 약하다는 것을 알고있는 박종팔은 서덜랜드의 복부에 강력한 레프트훅 한방을 꽂아넣고, 서덜랜드를 다운시켜 버린다.

       

      박종팔은 서덜랜드의 복부에 집중적인 공격을 가해서, 6라운드, 8라운드, 그리고 11라운드에 총 4번의 다운을 빼앗으며 일방적인 경기를 펼쳐나간다.

       

      이후 박종팔의 집중적인 복부공격이 주효해서 서덜랜드는 큰 데미지를 입게되는데, 결국 11라운드에 박종팔의 폭발적인 연속 복부강타에 충격을 받은 서덜랜드는 그대로 KO로 무너져내리고 만다.

       

      박종팔의 스코틀랜드의 강타자 머레이 서덜랜드를 지능적인 복부공격과 강펀치로 계속 몰아부친 끝에 통쾌한 KO승 거두고, 대망의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타이틀을 획득하고, 이후 8차 방어라는 롱런가드를 달려나간다.

       

       

      박종팔 VS 머레이 서덜랜드 경기동영상 (84년)

       

       

       

       

       

       

      박종팔 VS 케시어스 나이토 동양 미들급챔피언 결정전 경기동영상 (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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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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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김기덕 영화에서 하차한 여배우 A양은 누구, 폭행강요 혐의로 고소

         

        김기덕감독의 영화 뫼비우스에 출연했다가 폭행과 배드신강요 등으로 하차한 여배우 A양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폭되고 있답니다.

         

        김기덕감독이 자신이 연출했던 영화 뫼비우스에서 주연으로 출연했던 여배우에게 따귀를 때리고 배드신을 강요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서 큰 논란이 되고 있답니다.

        이에 대해 김기덕감독의 주장과 그 여배우 A양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급기야 그 여배우 A양은 82일 김기덕 감독을 폭행과 강요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고 합니다.

         

        해당 여배우 A양은 김기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뫼비우스에서 감정이입이 필요하다며, 김기덕감독으로부터 따귀를 여러차례 얻어맞았다고 하며, 시나리오에도 없는 파격적인 배드신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답니다.

         

        여배우 A양의 주장에 따르면, 김기덕감독이 대본에도 없는 남성의 그곳을 실제로 손으로 잡는 행위를 강요했다고 하며, 결국 여배우 A양은 더 이상 영화촬영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영화촬영 2일만에 하차했다고 합니다.

         

         

        이 여배우 A양이 출연했다가 포기한 영화가 바로 2013년도에 촬영된 영화 뫼비우스이며, 중도에 하차한 A양 대신 이은우가 여주연으로 발탁되어 영화촬영을 이어나갔다고 하네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파격적인 배드신이 들어간 영화 뫼비우스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폭되고 있답니다.

        또한 이 당시 영화 뫼비우스의 여주인공자리를 포기한 여배우 A양이 누구인지,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궁금해하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이미 2013년도에 벌어진 일인데도 불구하고 여배우 A씨가 뒤늦게 김기덕 감독을 고소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김기덕감독은 2004년도에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2012년도에는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세계적인 명감독이랍니다.

         

        영화 '뫼비우스'의 한 장면

         

        그렇지만 인지도가 낮은 여배우 A양이 김감독을 고소했다가 불이익을 받게되는 상황이 두려워서 망설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찍은 후에 정신적인 상처가 워낙 컸고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게되어, 결국 여배우 A씨는 배우활동을 그만둘 각오로 뒤늦게 김기덕 감독을 고소했다고 합니다.

         

        여배우 A씨는 영화산업노조를 찾아가서, 자신이 겪은 사실을 알리고 자문을 받으면서, 법적대응을 결정했다고 하네요.

         

        여배우 A씨의 신고를 접한 영화노조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당시 영화 촬영스텝들을 만나는 등 탐문조사를 실시했다고 하며, 조사결과 실제로 김감독이 여배우 A씨의 빰을 2,3번 때리는 것을 목격한 스탭의 증언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또한 여배우 A양의 주장처럼, 여배우가 남성의 심볼(?)을 잡고 촬영하는 장면도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여배우 A양 관련 사건을 조사했던 영화산업노조는 그동안 심층적인 조사활동을 벌였고, 조사결과를 10일날에 발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같은 여배우 A양의 폭행과 강요 주장에 대해, 김기덕 감독측에서는

        김감독이 여배우 A씨의 빰을 때린 것온 맞지만, 이것은 연기지도를 위해서 행한 것이고, 각본에도 없는 배드신을 강요한 사실은 없다고 해명하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김기덕감독으로부터 폭행과 배드신강요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배우 A양은 과연 누구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여배우가 누구인지 큰 궁금증을 갖고 있답니다.

          

         

        그리고 여배우 A양은 또다시 견디기 힘든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아뭏튼 김기덕 감독을 폭행 및 강요혐의로 검찰에 고소를 한 상태이니, 앞으로 검찰의 조사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귄위있는 국제영화제에서 2번씩이나 큰 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명감독으로 명성이 높은 김기덕 감독이 왜 이런 얄궂은 일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만일 검찰조사를 통해서 그 여배우의 주장대로 김감독의 폭행 및 강요혐의가 인정될 경우에는 김기덕감독은 치명상을 입게될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폭행에 의한 강요죄가 법원에서 인정될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으며, 이럴 경우 김감독은 영화계에서 여러 가지 강력한 제재를 받게된답니다.

         

        영화의 투자와 제작, 배급, 상영하는 것도 제재를 받을 수 있으며, 김감독이 만든 영화의 상영도 못하도록 제재를 당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현재로서는 서울중앙지검에서 고소를 접수했기 때문에, 향후 서울중앙지검에서 면밀한 조사를 벌여서 재판을 통해서 진실이 가려질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나쁜남자에서 개성있고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서 우리영화계에 새로운 유망주로 떠올랐던 그녀가 그 후 왜 영화등에 출연하지 않고 은둔해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당한 심적 고통과 트라우마를 심하게 겪은 것 같습니다.

         

         

        명감독과 신인여배우 관계는 소위 갑을관계라고들 말하고 있답니다.

        외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하나 있는데요.

         

        1972년도에 만들어진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라는 이탈리아영화가 있는데요. 이 영화에서 남자주인공 말론 브란도가 여주인공 마리아 슈나이더를 성폭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감독과 말론 브란도가 짜고서 19살 신인여배우인 마리아 슈나이더를 실제로 강간했다고 하며, 이 장면을 고사란히 촬영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인 2007년도에 마리아 슈나이더는 자신이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에서 강간당했다고 고백을 했답니다.

         

        마리아 슈나이더가 나중에 고백을 한 것은 영화를 찍을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19살의 나이였고, 너무도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제대로 판단하기 힘들었고, 그냥 감독의 설득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을의 입장이였던 신인여배우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만 것이랍니다.

         

         

        영화 '뫼비우스'의 여주인공 이은우

         

        영화 뫼비우스는 파격적인 불륜정사 등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영화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 등 가족간의 성적인 근본적인 문제를 심도있고 파격적으로 다룬 무언극형태의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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