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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프라이즈오세아노스호 침몰사고의 놀라운 기적, 사망자수, 전원 생존

     

    유럽에서도 세월호 침몰사건과 매우 유사한 해양참사가 발생했다고 해서 큰 관심을 끌고 있는데요.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오세아노스호 침몰사건이 바로 그것이랍니다.

     

    1991년도에 남아프리카의 남부해역에서 발생한 오세아노스호 침몰사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세월호 침몰사건과 비슷한 부분이 많이 있어서 우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답니다.

     

    오세아노스호는 바다에서 사고가 발생한 후, 선장과 승무원들이 자기들만 먼저 살겠다고 승객들을 버리고 먼저 도주한 점도 세월호 침몰사건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랍니다.

     

    그런데 오세아노스호 침몰사건세월호 침몰사건과 다른 점이 한가지 있답니다. 그것은 오세아노스호에서는 사망자가 단 한사람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지요.


     

    선박의 규모나 크기, 침몰사고, 승무원들의 대처 등 여러가지 면에서 두해양사고는 비슷한 면이 많지만, 오세아노스호는 단 한사람의 승객도 사망하지 않는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세월호 침몰사건은 무려 30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너무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오세아노스호의 기적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답니다.

     그럼 오세아노스호 침몰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좀 더 깊이 들어가보도록 하지요.

     

    199183일 여객선 오세아노스호는 수십년 경력의 베테랑인 야니스 아브라나스 선장과 26명의 승무원을 포함해 580명의 승객들을 실고, 이스턴런던을 출발해서 더반을 향해 출항합니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이스턴런던을 출발해서 남아프라카에 있는 도착지 더반으로 가는 항해인데, 대략 16시간 정도 걸리는 항해라고 합니다.

     

    오세아노스호의 운항을 총괄하는 선장 야니스 아브라나스는 수십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선장이라고 하며, 그 외 유능한 승무원들이 다수 승선해 있었지요.

     

    오세아노스호는 길이 153m에 폭 22m이고 7천톤급의 거대한 여객선인데, 세월호도 길이 145m에 폭 22m, 6,835톤으로 오세아노스호와 세월호는 크기와 규모면에서 매우 비슷한 형태의 여객선이랍니다.

    그래서 오세아노스호 침몰사건을 얘기할 때는 세월호가 자꾸 떠오르게 된답니다.


     

    오세아노스호는 선내에 실내수영장과 커다란 휴게실, 그리고 대규모 공연장 등을 완비하고 있는 유럽인들과 아프리카인들에게 아주 인기 좋은 여객선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를 주로 운항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83일 오세아노스호가 이스턴런던을 출항한 그날밤 바닷가에 갑자기 큰 폭풍우가 몰아치게 됩니다.

    폭우를 동반한 거친 폭풍이 몰아치고, 거센 파도가 출렁이게 되고 여객선 오세아노스호는 이리저리 흔들리게 된답니다.


     

    선내의 탁자위의 물컵이 떨어지고, 화분이 쓰러지는 등 오세아노스호 선내에서 적지않은 소동이 발생합니다.

     

    폭풍이 몰아친 그다음날 아침 930분경, 벌크헤드에 10cm크기의 구멍이 뚫리면서 그 틈새로 바닷물이 노도와 같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기관실쪽으로 바닷물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으며,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바닷물은 기관실과 발전기실을 침수시키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수십년 경력을 갖고있는 선장 야니스 아브라나스는 이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사태수습을 제대로 하지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승무원들도 우왕좌왕하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선장실과 기관실까지도 바닷물이 계속 유입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선장은 사태수습하기는커녕, 전혀 엉뚱한 결단을 내리게 되지요.

    선장은 승무원들과 함께 제일 먼저 구명정을 찾아냈고, 가장 먼저 구명정을 타고 선박을 탈출해버렸답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 오세아노스호에서 발생하고만 것이랍니다.

    수십년 경력의 배테랑이라는 선장이 배에 물이 들어오고 배가 기우는 상황에서도, 승객들에게 대피방송이나 경고방송을 전혀 하지않았고, 자신들만 살겠다고 가장 먼저 구명보트를 타고 배에서 탈출했다고 합니다.

     

    이런 무책임한 오세아노스호의 야니스 아브라나스선장의 행태를 보면, 바로 세월호의 이준석선장이 떠오른답니다.

     

    오세아노스호 침몰당시 선장과 승무원들은 세월호 침몰당시의 이준석선장, 승무원들과 똑같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준석선장도 2014년 세월호 침몰사건이 당시 제일 먼저 구명정을 타고 선박에서 빠져나온 파렴치한 행동을 했답니다. 그 댓가로 이준석선장은 현재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랍니다.

     

    그런데 세월호보다도 23년 먼저 발생한 오세아노스호 침몰사고당시에도 못된 선장 야니스 아브라나스가 배에 타고있는 580명의 승객들에게 대피안내 방송 한번도 하지않고, 승무원들을 데리고 먼저 도망치고 말았지요.


     

    배의 운항과 대피를 총괄해야할 선장과 승무원들이 사라지고 없는 오세아노스호는 점점 더 배가 기울어지고, 바닷물이 계속 밀려들어오게 된답니다.

     

    오세아노스호가 침몰하게 된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세아노스호가 항해를 시작한 첫날 저녁때에 사나운 폭풍이 몰아친 것도 침몰의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데그보다도 더 큰 침몰원인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오세아노스호에는 기관실을 식히기 위해서 여러개의 해수흡입구라는 장치가 달려있는데, 이 해수흡입구로 해수를 빨아들여서 뜨거워진 기관들을 식혀주는 역할을 한답니다.

     

    그런데 이 해수흡입구를 연결하는 파이프 밸브에 틈이 벌어졌다고 하며, 그 밸브 틈새로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밀려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밸브 틈새로 밀려들어온 바닷물은 배의 곳곳에 설치된 하수파이프를 통해서 선박전체로 퍼져나가게 되었다고 하네요.

     

    해난에 대비해서 배의 여러곳에 방수벽을 만들어놓았지만, 파이프를 통해서 배의 전역으로 펴져나가는 바닷물을 결코 막을 수가 없었답니다.


     

    이렇게 해수흡입구의 밸브에 하자가 발생하였는데도, 선장과 승무원들이 귀챠니즘에 빠져서, 제대로된 정비나 유지보수를 하지않았기 때문에, 오세아노스호는 그렇게 불행한 침몰사고를 당하게된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오세아노스호의 침몰은 밸브의 고장이 1차적 원인이고, 폭풍을 2차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오세아노스호 침몰사건은 전형적인 인재라고 할 수 있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오세아노스호 선내에서는 클럽가수인 모스 힐스 부부와 코미디언 테리 레스터, 마술사 로빈 볼트맨과 엔터네인먼트팀을 이끌던 오락부장 로레인 벳츠도 타고 있었답니다.

     

    특히 오세아노스호의 공연장에서 가수 모스 힐스가 자신의 밴드와 노래를 부르는 등 공연을 벌이던 중이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리와 함께 기관실과 발전기실에 물이 차면서 전기가 나갔고, 결국 배의 작동이 완전 멈추게 되었지요.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가수 모스 힐스와 로레인 벳츠는 곧바로 기관실과 선장실로 찾아가서 상황을 조사해보았는데요.

    기관실엔 이미 물이 가득 차올랐고, 배의 모든 기관과 운항이 정지됐고, 배가 침몰해가고 있다는 것을 두사람은 비로소 인지할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선장과 모든 승무원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가수 모스 힐스와 로레인 벳츠는 오세아노스호의 모든 승객들을 구조할 방법을 함께 모색해나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수 모스 힐스는 배의 기관실과 항해실들을 수색하다가 무전기를 찾아내고야 맙니다모스 힐스는 그 무전기로 정부당국에 배가 침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신속한 구조를 요청하게 됩니다.

     

    만일 모스 힐스가 무전기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오세아노스호의 모든 승객들은 아마도 불귀의 객이 되고야 말았을 겁니다.


     

    배가 침몰해가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모스 힐스와 엔터테인먼트팀원들은 당황하지 않았고 침착하게 승객 모두가 살아나갈 수 있는 최상의 방안을 찾고 또 그것을 추진해 나가는데요.

     

    모스 힐스가 무전기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에 구조요청을 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구조선이 이곳으로 도착하게 되어있는 상태랍니다.

    그리고 구조선이 도착할 그 때까지, 점점 침몰해가고 있는 배안의 모든 승객들을 구조가 가능한 갑판부분으로 이동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답니다.

     

    가수 모스 힐스가 생각해낸 발상은 승객들에게 배가 침몰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대피훈련을 실시한다고 거짓통보를 해서, 승객들을 대피시키기로 한 것이랍니다.

     

    만일 승객들에게 배가 침몰해간다는 사실 그대로 알린다면, 승객들을 완전 패닉상태에 빠져들어서 오세아노스호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지요. 이렇게 큰 혼란이 일어나면, 승객들 구조가 더욱 힘들어질 뿐이랍니다.


     

    가수 모스 힐스는 다른 엔터테인먼트팀원들과 함께 오세아노스호에 타고 있는 모든 승객들의 객실을 돌아다니면서, 승객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 모두를 갑판위로 이동시킵니다.

    결국 모스 힐스의 기지로 승객 580명 전원을 배의 갑판위로 소집하는 데에 성공했답니다.

     

    대피훈련일 줄 알고 갑판위로 올라왔던 승객들은 배가 침몰해가는 있는 상황을 발견하고는 모두 아연실색하였고, 두려움과 공포속에 치를 떨게 된답니다.

     

    그런데 이같은 위기의 순간에서도, 모스 힐스와 연예관계자들은 승객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재미있는 개그입담을 선보이고, 마술쇼도 보여주면서, 놀란 승객들을 안심시켜 놓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같은 암울하고 공포스러운 시간들이 지나가고, 구조를 요청한지 9시간만에 드디어 대규모 구조선단들이 오세아노스호 주변에 도착했답니다.

    남아프리카정부가 침몰해가는 오세아노스호의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16대의 구조선과 많은 구조헬기들을 보내준 것이지요.


     

    이당시 오세아노스호는 30도나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기에, 승객을 구명정으로 구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여러대의 헬기를 이용해서, 승객들을 한사람씩 옆에 대기하는 구조선으로 옮기는 작업에 돌입했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속도가 너무 늦고 배가 점점 더 깊이 침몰해갔기 때문에, 헬기로 두사람씩 엮어서 한꺼번에 옮겼다고 합니다.

     

    결국 수시간 동안 끈질긴 구조작업을 통해서, 오세아노스호의 승객 580명이 전원을 구조하는 데에 성공했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승객들 구조에 앞장섰던 모스 힐스와 연예관계자들은 승객들이 모두 구조된 뒤에 맨 나중에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요, 먼저 도망친 것으로 알려졌던 야니스 아브라나스선장이 놀랍게도 구조될 당시까지도 배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야니스선장은 배에 바닷물이 밀려오기 시작한 초기에, 승무원들과 먼지 배를 탈출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야니스선장이 구명정을 타고 배에서 먼저 탈출했던 것은 사실이랍니다. 그리고 승무원들도 구명정을 타고서 배를 탈출했었지요.

     

    그런데 배에서 탈출해서 구명정을 타고 바다로 나갔던 야니스선장은 폭풍우가 몰아치고 거센 파도고 휘몰아치자,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어쩔 수 없이 오세아노스호로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배로 다시 돌아왔던 야니스선장은 승객들 몰래 배에 있는 은밀한 방에 숨어있었다고 하네요. 이렇게 숨어있던 야니스선장은 구조선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갑판으로 나가서 제일 먼저 구조헬기에 오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합니다.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하지않았던 비열한 야니스선장은 나도 사람이므로 살아야한다고 앙탈과 고집을 부린 끝에, 제일 먼저 헬기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이 야니스선장이라는 사람은 세월호의 이준석선장처럼 아주 비열하고 잔악스러운 사람입

    니다.

    아뭏튼 오세아노스호의 모든 승객들이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구조되었답니다.

    이렇게 모든 승객들이 구조된 후에, 오세아노스호는 바닷물속으로 침몰되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절대절명의 순간에서도 승객들을 모두 구조해내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큰 노력을 기울인 가수 모스 힐스와 엔터태인관계자들은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랍니다.

     

    승객들을 버리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먼저 도망쳐버린 비열한 선장과 승무원들과는 너무도 비교된답니다.

    모스 힐스와 연예인관계자들의 자기희생 정신과 지혜로운 대처가 없었다면, 오세아노스호의 승객 580명은 결코 살아남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모스 힐스 등의 슬기로운 대처 때문에, 전멸을 당할 뻔했던 오세아노스호의 승객 580명을 모두 구조해내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비슷한 해난참사를 겪어서 304명의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치른 우리는 오세아노스호의 침몰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큰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해난사고나 재난사고는 언제가는 또다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승객을 버리고 먼저 탈출을 시도했던 야니스선장과 승무원들은 모두 형사재판을 받았고, 전원 유죄판결을 받아서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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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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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나라를 건국한 여걸 소서노와 주몽의 슬픈 사랑과 업적, 아들 온조

       

      우리나라 고대국가 성립시에 상당히 큰 역할을 담당했던 여걸이 한명이 있는데, 바로 소서노가 그 주인공이다,

      소서노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시기에 없어서는 안될 여장부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세우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고구려를 동부여에서 망명해온 주몽이 세웠다고 하지만, 동부여에서 빈털터리로 쫒겨왔던 주몽에게 한 나라의 기틀이 될만한 막대한 자금, 경제적 후원, 그리고 군사력까지 아낌없이 지원해주어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 인물이 소서노이다.

       

      또한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서, 아들과 함께 백제를 세울 수 있게 도와주었던 인물도 역시 소서노이다.

      그래서 사학자들은 소서노가 두 개의 고대국가를 세운 여장부라고 큰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고대국가 3국 중에 두 개의 막강한 나라,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할 수 있게 토대를 만들어준 소서노는 우리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단 그녀의 사랑과 개인적인 삶은 녹록지 않았고 애석하기 그지없었다.


       

      소서노는 남편과 아들 두남자를 뒷바라지해서 두 개의 고대국가를 건국하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사실상 사랑에는 실패하고만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소서노가 사랑했던 두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우태와 주몽 두사람과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는 세울 수는 있었지만 사랑만큼은 여장부인 소서노도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럼 소서노가 주몽을 만나게 된 사연과 국가를 건국하게 된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족장의 딸 소서노, 주몽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고구려건국

       


      소서노가 주몽을 만나게 된 데에는 부여와 관계된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다.

      주몽은 원래 기원전 1세기경 만주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동부여의 왕자였다.


      고구려가 아직 태동하기 전인 기원전 1~2세경에는 만주에서 가장 큰 패권국가는 바로 부여였다. 고구려가 없었을 때였으니까, 이때는 부여가 만주에서 황제국가 노릇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동부여를 통치했던 금와왕에게는 유화부인이라는 첩실(후궁)이 있었는데, 유화부인의 아들인 주몽은 금와왕의 서자였고, 동부여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주몽은 금와왕의 친아들은 아니며, 원래 주몽의 친아버지는 해모수라는 인물이다.

       

      북부여의 왕 해모수가 유화부인과 하룻밤 사랑을 통해서 주몽이 태어났으니,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인데, 안타깝게도 해모수가 유화부인과 딱 하루밤 사랑을 나누고 그녀를 버리고 만다.


       

      해모수에게 첫사랑을 바쳤던 유화부인은 해모수에게 버림을 받고 난후, 주몽을 임신했는데, 유화부인의 아버지이자 족장이었던 하백은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한 유화부인을 가문의 치욕거리라고 비난하면서 내쫒아버리고 만다.

       

      해모수의 달콤한 사랑의 입놀림에 넘어가서 처녀의 몸으로 자식까지 임신한 가엾은 유화부인은 임신한 몸을 이끌고 만주벌판을 떠돌아다가 결국 탈진해서 쓰러지고 만다.

       

      이렇게 광야에서 쓰러져있는 유화부인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동부여의 금와왕이인데, 그는 동부여의 국경지역을 순찰하던 중이었고, 비록 임신한 몸이었지만, 원래 미모가 출중했던 유화부인이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한 금와왕은 그녀를 가엾게 여기고

      즉시 유화부인을 궁궐로 데려갔고, 이로써 유화부인은 동부여의 궁궐에 들어가서 지내게 된다.


       

      이렇게 유화부인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금와왕과 궁궐에서 함께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금와왕의 첩실(후궁)이 되었고, 유화부인이 낳은 아들 주몽은 금와왕의 아들로 입적되어 주몽은 동부여의 왕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동부여에는 금와왕의 왕비가 따로 있었으며, 왕비가 낳은 장자 대소가 따로 있었다.

      정실부인의 자식이자 장자인 대소는 당연히 금와왕의 후계서열 1순위로 다음 보위를 이을 유력한 후계자였다.

       

      그런데 첩실부인의 아들(서자)인 주몽이 어렸을 때부터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무예실력으로 대신들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신출귀몰한 무예실력과 백발백중의 활쏘기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주몽이 금와왕의 총애를 독차지해버리자, 장자인 대소왕자는 주몽을 크게 시기하고 그를 눈에가시처럼 여기게 된다.

       

      동부여의 정실왕비의 아들이자 장자로서 금와왕의 후계서열 1순위였던 대소왕자는 총명하고 뛰어난 무예실력을 지니고 있던 주몽에게 혹시나 왕의 후계자자리를 빼앗길까봐 염려한 나머지, 끊임없이 주몽을 괴롭히고,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고 온갖 공작을 다 벌여나간다.

       

      그러던 어느날 대소왕자가 부하들과 함께 주몽을 살해하기로 모의를 꾸미는 것을 엿듣게 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주몽을 급히 불러서 이곳을 떠나라고 당부하게 된다.


       

      어머니 유화부인은 아들 주몽에게 대소왕자가 너를 죽이기로 이미 모의하였으니, 이곳에 더 있다가는 너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으니, 아들아! 아주 먼 곳으로 떠나서 그곳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대업을 이루거라라고 말했고, 주몽은 지체없이 동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도망가게 된다.

       

      동부여의 왕자 주몽은 자신의 추종자인 오이, 마리, 협보등의 측근들을 데리고 급히 동부여를 탈출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대소왕자는 군사들을 이끌고 주몽의 뒤를 추격하게 된다.

       

      동부여에 있을 때 주몽은 이미 혼인해서, 부인 예씨가 있었지만, 대소왕자 군사들의 갑작스러운 추격 때문에, 급히 탈출하게 된 주몽은 부인 예씨를 동부여에 남겨놓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대소왕자의 위협이 너무 커서 주몽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예씨부인을 동부여 볼모처럼 남겨놓고 탈출하게 된다.


       

      자신의 일부 측근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던 주몽은 남만주에 있는 졸본부여로 들어오게 되며,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런데 원래 주몽은 정치적 야망이 매우 큰 인물이다. 주몽의 친아버지 해모수와 양아버지 금와왕 모두 한나라의 국왕이었고, 왕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주몽 또한 한 나라의 제왕이 되고자 하는 커다란 야심을 갖고 있었다.

       

      동부여에 있을 때도 주몽은 배다른 형들인 대소왕자등과 사이에서 왕위계승 싸움을 하다가 밀려났기 때문에, 동부여를 탈출했던 것이다. 

      왕이 되고자 하는 주몽의 야심을 잘알고 있었던 어머니 유화부인도 주몽에게 남쪽지방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주몽이 정착했던 곳은 졸본지방으로 만주의 패권국가인 동부여의 직접 통치를 받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큰 범위에서는 동부여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졸본부여라고 불리우던 지역이었다.


       


      그 졸본부여에는 5개의 부족들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의 다섯 부족들이 지역을 나눠서 각각 통치하고 있었다.

       이 졸본지역의 5개의 부족 중에서도 특히 가장 크고 강력한 부족이 계루부였고, 계루부를 다스리는 부족장은 연타발이었고, 그의 둘째딸이 바로 소서노였다.

       

      부여의 직접적인 통치력이 미치지 않었던 이곳 졸본지역에서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 주몽에게,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경제적 기반과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동부여에서 급하게 탈출해오는 바람에 주몽을 따르는 추종자들은 협보, 마린 등 몇 명의 참모들과 몇십명의 호위병들이 전부였고, 그것만으로는 결코 국가를 세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졸본의 다섯 개의 부족 중에서, 주몽이 나라를 건국하는 데에 필요한 풍부한 경제력과 필요한 군사력을 제공해줄 수 있는 부족은 바로 가장 큰 계루부였고, 계루부의 족장 연타발은 국제무역으로 큰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몽은 계루부의 부족장 연타발과 줄을 대기위해서, 그의 둘째딸 소서노에게 접근하게 된다.

       

      BC 38년경 졸본부여 지역에서 연타발상단은 최대의 상단을 꾸며서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연타발족장의 딸 소서노가 마을골목에서 좀도둑에게 도둑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발생하였는데,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주몽과 부하들이 그 도둑을 붙자고 소서노일행을 도와주게 된다.

       

      고구려를 건국하기 1년 에 주전몽은 졸본부여 지역에서 소서노를 운명처럼 만났던 것은 사실이고, 이런 인연으로 소서노의 집안에 식객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부분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주몽이 사전에 입수한 정보에 의해서, 졸본지역의 부족장이자 최대의 상단을 거느리고 있는 연타발과의 관계를 맺기위해서, 일부러 소서노에게 접근해서 호의를 갖도록 그런 공작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졸본지역에서 가장 큰 권력과 풍부한 재산을 갖고있었던 연타발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그의 총애하는 딸 소서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주몽과 그의 참모들은 소서노와의 연분으로 계류부족장(졸본부여의 군장)인 연타발의 식객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몽은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에게 자신이 동부여의 왕자출신이라는 점을 밝히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계획을 갖고있으니 협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인재는 인재를 알아보는 법, 대상단의 수령이자 부족장이었던 연타발은 주몽이 장차 제왕이 될 대단한 영웅임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딸 소서노와 혼인시키고 물산양면으로 도움을 주게 된다.

      다시 말하면 주몽과 연타발이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해서 서로 정략결혼을 맺고, 정치적 연대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동국통감의 기록에도 주몽이 졸본부여로 들어오자, 졸본지역의 군장(연타발)이 주몽이 장차 크게 될 인물임으로 알아보고, 자신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시켜서 연대를 강화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주몽이 졸본지역의 군장 연타발의 신임을 크게 얻게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원래 졸본지역은 동쪽으로부터 말갈족들이 자주 쳐들어와서 약탈을 일삼는 바람에 백성들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을 접한 주몽은 연타발의 군사 일부를 인솔해서 국경지역으로 쳐들어온 말갈부족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여나갔고, 그 말갈부족을 크게 물리치는 수훈을 세웠다고 한다

      주몽의 군대에 크게 혼쭐이 난 말갈부족은 다시는 국경근처를 얼씬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졸본지역의 큰 우환거리를 주몽이 완벽하게 처리해주었으니, 계루부의 족장 연타발로부터 주몽은 완전한 신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소서노는 원래 첫번째 남편 우태와 혼인해서 두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남편이 전쟁에서 이민족과 싸우다가 전사해서 현재는 과부로 지내고 있었다.

      오랫동안 아버지집에서 독수공방을 해오던 미망인 소서노는 바람처럼 나타난 젊고 용기있고 박력 넘치는 왕자 주몽에게 단숨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BC 37년경 주몽의 나이는 꽃같은 22살이며 과부 소서노의 나이는 주몽보다 8살이 더 많은 30세의 나이로서, 30대의 한참 물오른 과부가 22살의 꽃미남 주몽에게 홀딱 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주몽은 자신의 바램대로 소서노의 남편이 되어서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의 막대한 자금과 물자, 그리고 엄청난 군사력을 제공받을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졸본지역의 5개 부족을 차례차례로 병합해나갈 수 있었다.

       

      주몽은 주변의 부족들 중 말을 잘 듣는 부족들은 평화적 협상을 통해서 통합해나갔고, 말을 안듣는 부족들은 연타발의 군사력을 이용해서 전쟁으로써 제압했고, 이렇게 5개 부족을 모두 통합함으로써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고구려를 보통 5부족 연맹체국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졸본지역의 5개 부족들이 연맹해서 세운 국가라는 뜻이다.

       

      부인 소서노로부터 권력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된 주몽은 졸본지역의 모든 부족들을 통합할 수 있었고, 마침내 BC 37년도에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아무리 주몽이 부여의 왕자 출신이라고 하지만, 소서노의 풍부한 경제력과 군사적 지원이 없었다면, 주몽은 결코 고구려를 건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해 나왔을 때에는 사실상 몸뚱아리 하나뿐이었고, 고작 몇십명의 호위병들만 따랐을 정도로 매우 초라한 상태였다.

       

      소서노에게는 비류와 온조라는 두아들이 있었지만, 나라를 건국하고 제왕의 자리에 오른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아껴주고 보호해주었다.

       

      건국 초기의 고구려의 영토는 압록강 중류의 자그마한 졸본지역이 전부였는데, 주몽의 목표는 넓고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후에 주몽왕은 나라 곳곳에 성채를 쌓고 방어를 굳건히 하고 군사력을 크게 확충해나갔다.


       

      주몽은 군사들을 출동시켜서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건국후 4년에 주몽은 비류국으로의 진출을 도모했다.

      대규모 전쟁보다는 협상을 통해서 주변의 부족통합을 원했던 주몽은 압록강 지류인 혼하(동가강)에 있는 비류국군장 송양을 직접 만나서, 영토합병에 관한 담판을 지었다.

       

      나이 많고 노련한 비류국왕 송양은 자신이 국가운영 경험도 많고 조상대대로 이 지역의 군장을 지내왔으니, 자신에게 국왕의 자리를 넘기고 졸본은 자신들의 속국이 되라고 요구했다.

       

      이에 주몽은 자신은 하늘을 다스리는 천재의 아들이라서 제왕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활쏘기 시합을 벌여서 우열을 결정하자고 제안했고, 두사람은 활쏘기 시합을 벌였다.

       

      송양은 주몽의 백발백중의 활쏘기능력을 보고 기가 완전히 꺾어서, 결국 1년이 지난 후에 나라를 주몽에게 바치게 된다.

       

      그런데 비류국의 군주 송양의 딸이 나중에 주몽의 아들 유리(훗날 유리왕)의 아내가 되는데, 결국 주몽과 송양 사이에 정략결혼을 통해서, 비류국이 고구려의 속국으로 통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몽이 비류국을 통합하고 난 다음에 그 곳을 다물도라고 명명했는데, ‘다물도란 지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의 옛말인 다물은 원래 되물리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다물도되물린 영토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되물리다라는 것은 되찾다, 도로 다시 찾다라는 뜻과 같은데, , ‘다물도를 풀이해보면 되찾은 영토라는 의미가 된다.

       

      주몽이 압록강의 중류지역인 비류국의 영토를 차지하고서, 그곳을 다물도라고 지명을 바꾼 것은, 우리가 되찾은 고조선의 옛영토라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 주몽은 우리의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았다는 의미에서 비류국의 영토를 다물도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주몽은 비류국의 영토를 확보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주변지역으로 영토확장사업을 벌여나갔다.

      주몽은 재위 210월에 오이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태백산(백두산)의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을 정벌하게 해서 행인국의 영토를 확보했고, 11월에는 장군 부위염을 앞세워서 북옥저의 넓은 영토를 정복했다.

       

      이렇게 주몽은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계속해서 주변의 여러부족들과 지역들을 차례차례로 정복해나갔으며, 만주지역에서 동부여 못지않은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고구려가 어느정도 안정적인 기반이 쌓여나가자, 주몽은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고구려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주몽의 후사를 이어나갈 태자를 책봉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당시 주몽왕과 왕비 소서노 사이에는 비류와 온조라는 두아들이 있었는데, 고구려건국에 크게 기여했던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이 태자가 되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몽왕은 왕비 소서노와는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사실 주몽에게는 동부여에 남겨놓은 첫번째 부인 예씨가 있었고

      주몽이 다급하게 동부여를 탈출해나올 당시에 예씨부인을 동부여에 남겨놓고 왔다는 자책감과 그리움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또한 주몽이 탈출해올 당시에 예씨부인은 임신 중에 있었다.

       

      이제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고 나라가 안정권에 들어서게 됐으니, 주몽은 자신의 오래된 숙원을 해결하고 싶었다주몽의 오랜 숙원은 바로 동부여에 있는 예씨부인과 아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주몽왕은 고구려를 통치해나가면서도 종종 자신의 참모들을 동부여에 몰래 보내서 첫째부인 예씨와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주몽은 예씨부인이 자신의 아들 유리를 낳았다는 사실과 유리가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당시 주몽의 후사를 이을 태자책봉을 서둘러야 한다는 대신들의 요구가 빗발쳤고, 부인 소서노도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딴마음을 품고 있었던 주몽은 소서노와 대신들의 태자책봉 요구를 계속해서 나중으로 미루고 있었다.


       

      이당시 주몽의 본마음은 자신의 친핏줄인 예씨부인이 낳은 아들 유리를 태자로 세우는 것이었다.

       

      사실 현재의 두아들인 비류와 온조는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 소서노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던 것이다어떤 아버지가 자신의 친아들을 제쳐놓고, 남의 아들을 왕의 후계자로 삼고싶겠는가?

       

      그것도 모르는 왕비 소서노와 양아들 비류와 온조, 그리고 대신들은 태자책봉을 서두를 것을 매일같이 요구했다.

      이렇게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주몽은 자신의 책사 협보를 하여금 몰래 동부여로 들여보내서 아예 예씨부인과 아들 유리를 탈출시켜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첫번째부인 예씨와 친아들 유리를 고구려 궁궐로 불러들인 주몽왕은 왕비 소서노와 모든 가족, 대신들을 불러모은 후, 자신의 뒤를 이을 태자책봉을 선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몽왕은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를 제쳐놓고, 친아들인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다.

       


      왕비 소서노를 비롯해 두 양아들 비류와 온조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왕비 소서노는 자신과 아버지의 전재산을 털어서 주몽이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그리고 왕비로서 19년 동안 주몽왕을 위해 모든 내조를 아낌없이 다했는데, 배다른 아들이 태자로 책봉된 사실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소서노는 자신의 친아들 비류가 주몽왕의 후계자가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는데, 십수년만에 엉뚱한 자가 아들이라고 나타나서, 태자자리를 빼앗아가버렸으니 그 상실감은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폐하를 위해 십수년을 봉사하고 함께 해온 제게 이런 모욕과 배신감을 주시다니, 저는 폐하께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되었나요?’라고 말하는 소서노의 한맺힌 절규가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 지나간다.

       

      주몽왕을 만나 그를 왕위에 올려놓고, 19년 동안 모든 뒷바라지를 다해왔던 소서노는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는 순간, 자신이 주몽에게 철저히 이용당해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주몽은 원래 자신의 사랑하는 부인과 아들이 따로 있었고, 소서노는 단지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경제적인 스폰서 내지는 정치적인 후원자로 이용당한 꼴이 됐다.

       

      그렇지만 소서노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에 1등 공신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주몽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친아들을 태자로 삼는 것 또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서노의 입장에서는 주몽왕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소서노는 주몽에게 오직 이용만 당해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소서노는 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고 며칠 후에, 자신의 두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땅으로 떠나갔다.

       

      배다른 자식 유리가 왕이 된다면, 자신과 두아들의 앞날에 희망이 없어지고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서노는 자신의 두아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 위해서, 한반도의 남쪽땅으로 이주해갔다.


       

      실제로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주몽의 친아들(유리)이 태자가 되자 두려움을 느낀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열명의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서노는 자신이 갖고있는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자금을 만들고,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십여명의 신하들을 대동하고 한반도의 남쪽 한강유역으로 이주해갔다.

       

      또한 소서노가 남쪽으로 이주해 내려올 때에 수많은 백성들이 함께 따라내려왔다고 하는데, 소서노가 졸본지역의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

      이며

      이렇게 소서노일행을 따라온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은 소서노와 아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는 데에 큰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소서노는 남쪽에서 세운 나라이름을 백제(百濟)’라고 지었는데, 백성들이 자신들을 즐겨 따라왔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BC 18년 남쪽으로 내려온 두아들 중에, 비류는 인천지역으로 가서 미추홀을 세웠고, 둘째아들 온조는 하남 위례지역으로 가서 백제를 세웠다. 그렇지만 인천지역에 세웠던 미추홀이 얼마 지나지않아서 멸망하게 되고, 온조가 세운 백제는 크게 번성해나간다.

       

      역시 소서노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자금을 다 지원해서 백제건국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결국 소서노는 자신의 남편과 아들 온조가 두 개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세우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2개의 국가를 건국하게 만든 여인은 소서노가 유일하며, 소서노는 단순히 왕비나 태후를 떠나서 우리나라 역사상 두 개의 국가건국에 기여한 가장 뛰어난 여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백제를 세운 소서노의 최후

       

      그럼 온조와 비류의 어머니 소서노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소서노일가가 남하한 후에 소서노에 관한 기록은 아래 딱 하나뿐이다.


       

      삼국사기의 온조왕본기의 기록에서, BC 6(온조왕13)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했고, 5마리의 호랑이가 도성안으로 들어오더니, 갑자기 왕의 어머니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기록되어 있다.

      이에 온조왕은 신하들에게 요망한 징조가 자꾸 일어나 나라가 편안할 날이 없으니, 도읍지를 한수(漢水) 남쪽으로 천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BC 6년도에 나라에 무슨 안좋은 사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 당시에 왕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온조왕은 서둘러서 수도를 다른 지역으로 천도까지 하게 된다.

       

      이 기록은 역사사실을 사실대로 쓴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단어로 바꿔서 상징적으로만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은 따로 의역할 필요가 있는데, ‘늙은 할멈은 그 전체적인 뉘앙스를 보면 왕의 어머니라고 풀이할 수 있으며, 늙은 할멈=왕의 어머니=소서노라는 등식이 성립되는데, ‘늙은 할멈은 소서노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위의 기록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역시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남자권력을 의미하고, 이것을 풀이하면 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권력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5마리의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왔다를 풀이해 보면, 쿠테타나 정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 이기록을 전체적으로 뜻풀이를 해보면, 원래 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나라의 권력을 잡고 통치했는데, 그 과정에서 소서노와 아들 온조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고, 결국 아들 온조에 의해서 쿠테타가 일어났으며, 온조에 의해 어머니 소서노가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제를 세운 후에 처음에는 리더쉽이 강했던 어머니 소서노가 권력을 잡고 왕이 되었는데, 아들 온조가 어머니의 권력독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어머니의 통치에 크게 반발한 온조가 군사를 이끌고 쿠테타를 일으켜서 어머니 소서노를 왕위에서 끌어내려 살해하고, 자신이 백제의 왕으로 등극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런 안좋은 기록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부의 학자들의 해석이므로, 100% 맞는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글의 문맥이나 분위기로 볼 때에는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라고 보여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소서노는 정말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소서노는 두 번씩이나 나라를 세운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남자들에게는 두 번 이상이나 배신을 당했던 정말 불행한 여성이었다.

      한번은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배신을 당했고, 두번째는 자신의 피붙이인 아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이다.

       

      분명한 것은 소서노가 없었더라면, 고구려와 백제라는 두 개의 위대한 국가는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본다.


       

      기원전후의 시기에, 2개의 고대국가를 건국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위대한 여성 소서노는 한국역사에 있어서 엄청난 업적을 쌓았지만, 그녀는 안타깝게도 사랑에는 두 번이나 실패하고 만다.

       

      신은 인간에게 동시에 두가지의 선물을 주지는 않는다고 본다. 한가지를 얻으면 다른 한가지를 잃게 되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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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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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순실딸 정유라, 송환불복소송 포기, 국내로 송환 확정

         

        정유라가 앞으로 한달 이내에 국내로 송환된다고 하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최순실게이트사건 이후 아들과 함께 덴마크에 구금되어 있는데요.

        정유라는 최근까지도 덴마크 법원에서 한국송환 불복소송을 진행중에 있었답니다.

         

        정유라는 덴마크검찰이 한국송환 결정을 내리자, 덴마크법원에 한국송환 불복소송을 진행중에 있었고, 41일 덴마크 지방법원에서 한국송환 결정을 내렸지요.

        그러자 정유라는 덴마크 고등법원에 항소심을 제기했고, 68일 고등법원의 판결이 내려질 예정이었는데요.

         

        그런데 최근 정유라가 고등법원의 판결을 며칠 앞두고 전격 항소심을 철회했다고 합니다.

        , 정유라가 한국송환 불복소송을 포기하고 만 것이랍니다.

        아직 덴마크 고등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10여일 전인데 말이지요.

         

        정유라는 최순실게이트로 인해서, 금년 1월달에 덴마크의 올보르시에서 전격 체포되었고, 현재까지 144일 동안 구금되어 있는 중입니다.


         

        정유라는 왜 자신이 제기했던 국내송환 불복소송을 스스로 포기한 것일까요?

        정유라가 국내송환 불복소송을 포기했다는 것은 곧 정유라가 한국으로 송환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정유라가 한국송환 불복소송을 철회한 것은 항소심소송을 더 이상 진행할 실익이 없기 때문으로 풀이된답니다.

        송환 불복소송 1심에서 한국 송환판결이 났는데, 고등법원 재판에서도 한국 송환 판결을 뒤집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송환불복소송을 제기했을 때의 상황이랑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는 점도 있답니다.

        정유라가 송환불복소송을 제기했을 때는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문재인대통령이 당선된 후이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틴다고 해도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만 가중될 수밖에 없게 된답니다.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계속해서 지연전략으로 나가자, 우리나라의 특검은 정유라에 대해 체포영장의 유효기간을 무려 20238월까지 연장시켜 버렸고, 법원에서도 수용한 상태랍니다.

         

        그러니까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불복소송등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고 가더라도, 정유라에 내려진 체포영장은 6년 후까지 유효하기 때문에, 정유라가 6년 후까지 지연전술을 쓸 수가 없다는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지요.

         

        또한 정유라는 지금 덴마크에서 144일째 구금되어 있는 중이랍니다.

        만일 정유라가 한국에서 구금되어 있었더라면, 나중에 징역형의 실형을 받더라도, 그동안 구금되었던 기간(144) 만큼 차감해서 징역형을 살면 되는데, 덴마크에서 구금된 기간은 복역기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차피 정유라가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국내에서 구금되어 있는 것이 더 유리한 측면이 있답니다.


        정유라가 외국에서 구금되는 바람에, 그 구금기간(144) 만큼을 공제받지 못해서 훨씬 더 많은 옥살이를 하게 되는 셈이랍니다. 정유라가 앞으로 더 많이 덴마크에서 구금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자신의 구금기간만 더 늘려주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징역형에서 차감받지 못한 채 ~

         

        정유라는 이화여대 부정입학과 학사특혜 등 업무방해 혐의를 받고 있으며, 삼성으로부터 특혜지원 및 뇌물수수에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정유라가 송환불복 항소심을 철회함에 따라서, 우리법무부와 덴마크 당국은 정유라의 신병 인수 일정협의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법무부와 덴마크당국의 협의에 따라서, 정유라는 앞으로 한달 이내에 국내로 송환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습니다.

         

        정유라는 덴마크법에 따라서 앞으로 30일 이내에 국내로 송환될 예정이며, 정유라가 우리나라 공항에 도착한 즉시 체포되어, 검찰조사를 받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국정농단의 주역 최순실과 딸이 법정에서 함께 재판받는 모습을 볼 날도 멀지 않은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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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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