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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에 당선과 연설 동영상, 이낙연 국무총리 임종석 비서실장 내정

     

    201759일 치러진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문재인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41.1%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요. 자유한국당의 홍준표후보는 2위를 기록했으며, 24%의 득표율을 얻었습니다.

     

    보수우파들의 바램대로 홍준표후보가 문재인을 넘어서거나,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이번에 치러진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이 41.1%2위인 홍준표후보의 24%의 득표율을 무려 17%차이로 따돌리고 압도적으로 1위를 한 것으로, 대선에서 1위와 2위와의 표차이가 가장 큰 표차이로 이겼다고 합니다.



    득표수를 보더라도 문재인 13,423,800표를 득표했는데 비해, 홍준표는 7,852,849표를 득표해서, 문재인후보가 홍준표후보를 무려 557만표 차이로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답니다.

     

    18대 대선에서는 문재인후보가 박근혜후보에게 108만표 차이로 1위자리를 내주고 말았는데,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은 557만표 차이라는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면서, 19대통령에 당당히 당선된 것입니다.


     

    문재인당선인과 2위 홍준표후보와의 표차이 557만표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선거 사상 최대의 표차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17대 대선에서 이명박후보가 2위 정동영후보와의 표차이 531만표 차이가 최대 수치였는데,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이 새로운 신기록으로 갈아엎은 것이지요.

      

    후보

    득표율

    득표수

    문재인

    41.1%

    13,423,800

    홍준표

    24.0%

    7,852,849

    안철수

    21.4%

    6,998,342

    유승민

    6.8%

    2,208,771

    심상정

    6.2%

    2,017,458


     

    이번 대선에서 혹시나 문재인후보가 50%의 과반수 득표를 하지않을까 관심도 집중되었었는데,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고 봅니다. 

    2강 구도였다면, 문재인후보의 과반수 득표가 가능할 수도 있지만, 5명의 유력한 후보자들이 겨루는 5강 구도에서, 당선자가 40%를 넘겼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고 평할 수 있지요.

     


    양강구도로 치러졌던 제18대 대선에서 1위 박근혜후보가 51%를 득표해서, 2위인 문재인후보의 득표율 48%와 고작 3% 밖에 나지않는 턱걸리득표로 간신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것과 비교하면 문재인후보와 홍준표후보의 17% 차이는 대단한 표차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과거 노무현전대통령과 2위와의 표차이는 고작 57만표 차이밖에 나지 않은 것과 비교해도 큰 성과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당선인의 전국 득표율을 살펴봐도 역시 성과가 상당히 좋습니다. 문재인당선인은 전국에서 경남과 경북, 대구의 세곳만 제외하고, 모든 지역에서 득표율 1위를 차지했답니다.

     

    전통적인 보수우파의 텃밭이었던 대구와 경북, 그리고 홍준표후보가 도지사로 있는 경남에서만 문재인당선인은 1위를 하지 못했을 뿐인데

    서울, 경기도, 인천, 강원도, 충북, 충남, 울산, 제주도 등 나머지 모든 지역에서 골고루 1위 득표를 하는 안정적인 성과를 거두었지요.


     

    사실 오래전부터, 문재인의 당선은 예상되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금년 310일 박근혜 전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되었을 때부터 문재인의 대세론이 급부상했으며, 그 후 2개월 동안 문재인은 지지율 1위를 지속시켜 왔었지요.

     

    잠깐 동안 국민의 당의 안철수후보가 문재인후보의 지지율과 동률을 이루기도 했었지만, 안철수후보의 지지율상승은 1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하락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안철수후보는 새로운 보수우파의 희망으로 떠오른 홍준표후보에게 중도지지층과 보수지지층의 지지표를 상당수 빼앗기게 됨으로써

    반짝 타올랐던 안철수대세론을 이어가지 못하고, 대선 결과 3위로 추락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지요.

     

    아뭏튼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이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어서, 새로운 개혁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니,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의 19대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당선자는 과거처럼 인수위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선일 다음날인 510일 오전 810분부터 곧바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답니다.

      

    그런데 비록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앞으로 해야할 일과 도전들이 산적히 쌓여있습니다.

    문재인대통령은 자신이 제창하는 민생안정과 개혁법안 제정등 국정수행을 해나가는 데에 있어서, 국민의당 등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재인대통령이 속한 더민주당의 의석수는 120석에 불과하답니다. 비록 더민주당이 지난 총선에서 제1당으로 올라섰지만

    국회의석수가 과반수에 못미치기 때문에 국회에서의 법안의결에 있어서, 다른 정당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랍니다.

     

    문재인대통령은 당선자소감에서 다른 야당들과 함께 협력을 강화해나가겠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법률 하나 만드는데도 국회재적의원 과반수가 필요한데, 의석수가 부족한 여소야대의 상태라서, 더민주당으로서는 국민의당과의 연합이나 연대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랍니다.


     

    그래도 다른 야당에 비해서 정치적 노선이나 색깔이 가까운 국민의당과 정치적 연대를 결성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선과정에서 서로 날선 공방을 벌였지만, 이젠 선거가 다 끝난 후이므로, 문재인대통령이 안철수전대표를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국정의 협력과 동반자의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19대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이 앞으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개혁을 차질없이 수행해나가기 위해서는, 법률안의 제정이나 개정이 필요하며, 더민주당의 의원 120석으로는 국회에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답니다.

    반드시 국민의당이나 바른정당과의 국회에서의 협력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있는 문재인대통령도 야당을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국민대통합을 이루겠다고 밝힌 바가 있답니다.

      

    문재인대통령은 당선소감에서,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분들도 섬기는 통합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혔으며

    국민이 이기는 나라, 원칙이 바로 서는 나라를 만들겠으며, 국민만 보고 바른 길로 나아가겠다는 당선소감을 밝혔답니다.


     

    문재인대통령은 선거활동 당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를 국민에게 개방하고, 자신은 광화문 종합청사로 나와 업무를 보겠다고 공언했는데요과연 이러한 자신의 약속을 잘 지킬지도 궁금하답니다.

      

    참고로 박근혜전대통령의 파면으로 인해 실시된 대통령선거로 당선된 문재인대통령의 임기는 얼마 동안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는데요.

      

    문재인대통령의 임기 기간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인 2017510일부터 시작해서 5년 후인 202259일까지랍니다.

    문재인대통령도 여느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임기는 5년을 다 채우게 된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규정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문재인의 다음 대통령선거인 제20대 대통령 선거일은 임기만료일 전 70일 이후 첫째수요일에 치르도록 되어있는데, 202232일날에 치러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대통령은 자신을 보좌해나갈 국무총리와 비서실장, 국정원장을 내정했다고 하는데, 국무총리에는 이낙연 전남지사를, 비서실장에는 임종석 전의원을, 그리고 국정원장에는 서훈 전 국정원차장을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낙연 전남지사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면, 곧바로 업무를 볼 수 있지만, 국무총리와 국정원장은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하므로, 업무시작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국무총리에 내정된 이낙연 전남지사는 전남 영광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과거 동아일보 기자로 일해오다가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총 4선 의원으로 활동해온 인물입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전남도지사에 당선되어 도지사업무에 전념해왔으며, 통합새정부의 적임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랍니다.

     

    비서실장애 내정된 임종석 전의원은 전남 장흥출신으로 한양대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문재인 대선캠프 비서실장출신으로 활동해왔고

    과거 전대협의 3기 의장을 지냈던 86 민주화운동권 세대의 대표주자 중 한사람으로, 16대와17대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의원활동을 해왔습니다.

     

    국정원장에 내정된 서훈은 서울대 사범대출신으로 과거 참여정부 시절 국정원의 3차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이화여대의 북한학과 초빙교수로 재임 중에 있습니다.

     

    서훈 교수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북한통이자 대북전문가랍니다. 앞으로 국정원장에 취임하게 되면, 대북한 정책수립이나 북한과의 협상에서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답니다.

    문재인대통령이 앞으로 대북한 관계에 있어서, 대화를 추구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소감 연설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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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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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미남배우 아랑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 OST와 내용, 부인

        

      알랭 드롱 1935118일생 나이 83세

      프랑스 고전영화 태양은 가득히출연자 - 알랑 드롱, 마리 라포레, 모리스 로네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년도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져 큰 화제를 나았던 알랭 드롱 주연의 영화이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둔 프랑스영화로서, 당시 신인이었던 아랑 드롱을 일약 세계적인 톱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알랭 들롱의 출세작이다.

       

      태양은 가득히의 성공으로 무명이었던 아랑 드롱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알랭 드롱은 이 영화를 발판으로, 그후 수많은 범죄형사물과 갱단영화에 출연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와 영화카리스마를 쌓아나가게 된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부둣가의 하역작업원 출신이었던 신출내기 사나이 아랑 드롱을 일약 세계적인 톱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출세작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태양은 가득히는 차가운 눈빛을 가진 고독한 미남배우 아랑 드롱의 매력과 카리스마가 짙게 풍겨나오는 영화인데, 아랑 드롱이 왜 차가운 미남, 고독한 미남자인지를 톡톡히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태양은 가득히에서 차가운 눈빛을 발산하는 고독한 미남배우 알랭 들롱으로부터 짙게 풍겨나오는 차가운 매력과 반항아적 카리스마를 보여주면서, 고독한 미남자로서의 아랑 드롱의 매력을 전세계의 관객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후 알랭 드롱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미남배우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데, 그의 냉혹한 카리스마에 어울리는 영화들 라두 아미’ ‘시실리안’ ‘빅건’ ‘스콜피온’ ‘암흑가의 두사람’ ‘볼사리노등의 범죄스릴러 영화들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영화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프랑스에서 60~70년대에는 범죄스릴러물과 갱단영화들이 크게 유행했는데, 미남배우 알랭 드롱이 이같은 프랑스 범죄 갱단영화들의 붐을 크게 유행시킨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당시 프랑스의 범죄 갱단영화들을 함께 이끌어갔던 두사람은 바로 장폴 베르몽드와 알랭 드롱이었는데, 이 두명의 쾌남아들이 60~70년대의 프랑스 범죄 갱단영화의 흥행을 이끌었던 대표주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의 미남배우들은 기사도정신이 물씬 풍기는 기사영화나 로맨스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랑스의 아랑 드롱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는데, 아랑 드롱은 잘생긴 얼굴에도 불구하고, 로맨스영화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았고

      대부분 폭력적이고 어두운 분위기의 범죄영화나 갱단영화들에만 집중적으로 출연했으며, 이런 알랭 드롱의 범죄스릴러영화들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크게 히트했다.

       

      이런 현상은 알랭 드롱이 풍기고 있는 냉혹하고 차가운 미남자, 반항아적 미남자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70년대에는 유럽과 아시아의 수많은 관객들은 미남자 알랭 드롱의 박력있고 개성있는 연기에 크게 환호했고, 알랭 드롱의 인기는 고공행진을 거듭했는데, 확실히 70년대는 알랭 드롱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아랑 드롱은 잘생긴 외모만큼 여배우들과의 여러가지 스캔들을 뿌리면서 화제를 몰고다녔다.

       

      알랭 드롱은 총 세 번의 결혼을 하였는데, 첫 번째부인은 영화배우 로미 슈나이더이며, 두 번째부인은 64년에 결혼했던 나탈리 드롱이었는데, 5년만에 파경에 이르고, 그리고 세 번째부인은 90년도에 결혼한 80년대 월드미스유니버시티 출신인 로잘리 반 브레멘이다



      첫번째부인이자 독일출신의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와는 58년도에 만나 결혼했지만, 5년후에 파경에 이르렀는데 그후에는 서로 친구처럼 편안한 사이로 지내왔으나 그녀는 1982년에 사망한다. 

      로미 슈나이더는 아랑 드롱과 헤어진 후, 알콜중독과 약물중독에 걸려서 몸이 쇠약해져 82년 사망했는데, 죽는 날까지 첫사랑 아랑 드롱을 잊지못했다고 한다.


      아랑 드롱과 로미 슈나이더


      두번째부인인 모로코출신의 나탈리 드롱과는 64년도에 만나 뜨겁고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지만, 결국 5년만에 나탈리의 경호원 마르코비치 살인사건으로 갈라서게 된다.


      아랑 드롱과 두번째부인 나탈리 드롱


      그리고 90년도에 만난 세번째부인 네델란드 모델출신이자 월드미스유니버시티 출신인 로잘리 반 브레멘과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오랫동안 같이 잘 살았지만, 결국 2002년도에 이혼하였다. 


      아랑 드롱과 세번째부인 로잘리 반 브레멘


      두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 파비앙과 딸 레미도 아랑 드롱의 우수한 미모를 물려받아서, 현재 모델과 영화배우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아랑 드롱의 딸 레미는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는데, 아랑 드롱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상당한 미모를 과시한다


      그 후 알랭 드롱은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모델출신의 애인을 만나 연얘를 즐기고 있다는 소식이다.

       

      프랑스의 미남배우로 워낙 여자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던 알랭 드롱은 미래이유 다르코, 브리지드 바르도와도와도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프랑스 샹송가수 파트리샤 카스와 염문을 뿌리는 등 종종 혼외스캔들을 뿌리기도 했다.

       

      57년도에 데뷔해서 총 85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알랭 드롱은 영화배우로서 뿐만아니라, 영화제작자, 영화감독으로서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알랭 드롱은 단순히 얼굴만 잘생긴 미남배우가 아니라, 혼이 담긴 연기를 하는 열정적인 연기자였으며, 영화제작자로서도 높은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아랑 드롱과 나탈리 드롱사이에 태어난 안토니 드롱은 아버지를 빼닮은 미남자로서, 아버지처럼 영화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다시 영화 태양은 가득히로 돌아가보자. 아랑 드롱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청년 톰이 많은 것을 가진 부잣집 외아들 친구 필립으로부터 심한 모멸을 받아왔는데

      어느날 톰은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서, 그 친구가 가진 재산과 애인을 빼앗는 완전범죄를 꿈꾸고, 그 꿈을 하나씩 실행시켜나간다는 내용이다.


       

      속으로는 부잣집친구의 멸시와 모멸에 분노와 질투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그와의 친분관계를 화목하게 이어나가는 냉혹하고 이중적인 성격인 주인공 톰 리플리연기를 아랑 드롱은 진지하고도 실감나게 잘 소화해주었는데

      아랑 드롱의 개성있는 캐릭터를 아주 잘 살려준 아랑 드롱을 위한 영화였다고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다.


      친구를 잔인하게 죽이고 그의 모든 것을 빼앗는 냉혹한 인간의 내면적인 연기를 진지하면서 안정적으로 연기를 해낸 알랭 들롱의 연기력이 크게 돗보였던 작품으로60년도 프랑스영화의 최고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푸른 지중해바닷가에서 멋지게 울려퍼지는 니노 로타가 작곡한 '태양은 가득히'의 주제곡 ‘Plein Soleil’을 한번 감상해보도록 하지요. 



      아랑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주제가 동영상 




      영화 태양은 가득히줄거리

       

      톰 리플리(아랑 드롱분)는 항상 일확천금과 신분상승을 원하고 있지만, 현실은 가난과 빈곤으로 암담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톰 리플리에게는 항상 모든 것을 다 갖춘 부잣집 외아들 필립(모리스 로넷분)이라는 롤모델이 있다, 그런데 어느날 필립의 아버지로부터 필립을 데려오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게되고, 톰 리플리는 로마에 가서 필립을 만나지만, 교만한 필립으로부터 심한 멸시와 괄시를 받는다.


       

      톰은 필립으로부터 냉대와 멸시를 받고 심한 모멸감을 느끼지만, 돈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비위를 맞추면서 원만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돈과 지위를 갖춘 필립의 괄시를 받으면서도 톰이 그의 곁에 계속 붙어다니는 이유는, 그에게서 자신이 갖지못한 것에 대한 대리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립은 자신의 멋진 요트를 갖고서, 애인 마르쥬(마리 라포넷분)와 톰을 태우고 지중해로 나가 요트항해를 즐기게 된다.

      요트 항해에서 필립과 애인 마르쥬는 눈꼴사나운 애정행각을 벌여나가는데, 두 연인사이에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해버린 톰은 심한 모멸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이런 톰에게 필립은 온갖 방법으로 인간이하의 냉대와 멸시를 계속 해버린다.

       

      톰의 엄청난 모멸감은 분노감으로 바뀌고, 톰은 친구 필립을 제거하고 그가 가진 거대한 재산과 그의 애인까지도 빼앗을 욕망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톰은 완전범죄를 치밀하게 계획한다.


       

      톰은 고의적으로 이간책을 써서 필립과 마르쥬가 서로 다투게 만들었고, 마르쥬가 요트에서 내린 후, 두사람만 남은 요트위에서 톰은 자신이 구상한 완전범죄를 실행한다.

       

      톰은 필립과 사소한 말다툼하는 도중 칼로 필립을 살해하고, 필립의 시신을 우의에 쌓고 와이어줄로 감싼 후에, 아무도 알 수 없게 바닷물속으로 빠뜨려 버린다.

      톰은 필립의 시신을 지중해바닷물 속에 와이어줄로 완전히 결박해서 버렸으므로, 결코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톰은 은행에 있는 필립의 예금한 돈을 탈취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톰은 먼저 필립의 신분증을 위조한 후, 필립의 싸인을 똑같이 연습하고 필립의 목소리와 행동을 똑같이 흉내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한 끝에, 은행에 가서 필립의 돈을 탈취한다.


       

      그런데 우연히 찾아온 필립의 친구 프레디에게 톰의 범죄행각이 들통이 나버리게 되자, 톰은 트레디마저 교묘하게 살해한다.

       

      톰은 친구에 대한 모멸감과 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두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 돼버렸다.

      어차피 두명을 죽인 톰은 더욱 완전범죄를 꿈꾸고 자신의 범죄를 최대한으로 은닉하기 위해 갖은 공작을 다부린다.

       

      톰은 프레디를 필립이 살해한 것처럼 위장하고, 그런 상황을 연출해낸다.

      , 필립이 프레디를 살해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자살한 것처럼 꾸민다. 그리고 자살한 필립이 애인 마르쥬에게 전재산을 상속한 것처럼 가짜유언장을 만든다.


       

      수사를 시작한 경찰과 주변사람에게도 필립이 프레디를 살해한 것처럼,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들을 속이는데 어느정도 성공했다. 그리고 톰은 필립의 애인 마르쥬에게도 필립의 유언장을 제시하면서 그녀를 위로하는 척 접근해서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데 성공한다.

       

      이제 톰은 필립을 죽인 후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 짝사랑했던 필립의 애인 마르쥬도 얻었고, 필립으로부터 상속받은 마르쥬의 재산을 함께 나눠가질 수 있게 됐다.

      이때쯤 돼서 영화가 끝났다면, 톰이 꿈꾸웠던 완전범죄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톰의 완전범죄는 엉뚱하게도 전혀 예상치못한 곳에서 발각되고 만다.

      영화의 종반부 장면에서, 필립의 아버지는 필립의 요트를 육지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요트의 스크류에 걸린 우의에 감긴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스크류에 걸려있던 그 시체는 바로 필립의 시신이었던 것이다.


       

      톰이 필립의 시신을 우의로 감싸고 그것을 와이어로 묶어 바닷물속에 던졌는데, 시신을 묶었던 와이어줄이 물속에 있는 요트의 스크류에 걸렸던 것이고, 스크루에 계속 걸려있던 시신이 배에 이끌려 육지로 노출된 것이다.

       

      결국 경찰의 심도있는 재수사가 이뤄졌고, 톰의 범행이 낱낱이 밝혀지게 됐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인데,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한 톰이 해변가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데, 경찰들이 서서히 필립의 근처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경찰의 포위망을 눈치챈 필립은 오히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경찰에 맞이한다.

      마치 잠시라도 필립의 흉내를 낸 것으로도 만족한다는 것처럼 ~


       

      결국 일확천금을 꿈꾸고, 완전범죄를 꿈꿨던 톰의 욕망은 한낮 일장춘몽으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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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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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허리우드 최고의 미녀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영화와 생애, 죽음 아버지 존 켈리

         

        19291112~ 1982914

         

        미국 허리우드 역사상 최고의 미녀는 누구일까? 허리우드 여배우중 가장 우아한 미인은 누구일까?

        미국 역대 허리우드 영화계에서는 미녀들도 많고, 세계적인 스타들도 많은데, 항상 최고의 미인대열에 꼭 선정되는 여배우가 한명 있다.

         

        80년대부터 90년대, 2000년대까지 미국의 영화사이트에서 선정하는 10대 허리우드미녀들 가운데에, 항상 1, 2위에 선정되는 미녀배우는 바로 그레이스 켈리라는 여배우다.

         

        수십년간 진행되온 10대 허리우드미녀 선정에 그레이스 켈리가 항상 빠지지않고 선정되어왔던 이유는 그녀의 청순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본다.

         

        애수에 찬 커다란 눈망울, 가냘프면서도 오똑한 콧날, 살포시 다문 앵두같은 잎술, 금발의 우아한 웨이브진 머리결 등 청순하고 조각 같은 미모를 지닌 그레이스 켈리를 역대 허리우드 여배우들 중 최고의 미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레이스 켈리는 얼굴만 예쁜 마네킹배우는 결코 아니었고,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로서도 명망이 높은데, 명감독 알프레드 히치콕감독의 영화 이창에서는 아주 지적이면서 여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연기를 펼쳐서 큰 호평을 받았고

        1955년도의 영화 갈채에서는 최고의 연기력을 선보여서, 대망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레이스 켈리는 다른 여배우들과는 달리, 1951년도부터 1956년도까지 고작 5년 동안만 영화배우로서 활동했지만, 그녀가 남긴 족적은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레이스 켈리는 5년 동안 하이눈’ ‘이창’ ‘모감보’ ‘나는 결백하다’ ‘다이얼M을 돌려라’ ‘갈채’ ‘백조등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이 모두 흥행에 성공했던 걸작품들이라서

        전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환희를 안겨주었고, 그레이스 켈리는 당대 허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5년 동안 출연했던 작품들은 한결같이 큰 명성을 남긴 명작품들로서, 지금까지도 당대의 걸작품이라고 찬사를 받고 있는 영화들이다.

         

        명배우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 출연한 영화 모감보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레이스 켈리는 뛰어난 미모와 눈부신 연기력으로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고, 게리 쿠퍼와 함께 출연한 영화 하이눈은 내용이 알차고 감동적인 서부영화로서 서부영화의 백미라는 칭송을 받고 있으며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출연했던 영화 이창은 공포스릴러물의 최고 수작으로 손꼽히는 영화로 자리메김하고 있다.

         

        이토록 1950년대 전반 5년이라고 하는 짧은 기간 동안 선굵은 걸작품들에 출연하면서, 미모와 연기력을 갖춘 최고 미녀배우로 명성을 떨쳤던 그레이스 켈리는 1956년 갑자기 모나코의 레니에왕과 결혼을 발표해서 전세계의 수많은 팬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그해 4월 레니에왕과 전격 결혼함으로써 26세의 나이에 영화계에서 완전 은퇴하고 만다.


         

        그레이스 켈리는 아름다운 미모와 중후한 연기력으로 1950년대 미국 허리우드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세계적인 미녀스타였는데, 너무나도 일찍 결혼해서 허리우드를 떠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크나큰 아쉬움과 미련을 남겨주었던 배우로도 유명하다.

         

        어쩌면 다른 허리우드 여배우들과는 달리 그녀가 25세라고 하는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을 이유로 영화배우를 은퇴했던 것이, 그녀에 대한 애착을 더 크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한다.

         


        허리우드 영화계를 은퇴했던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왕국의 왕비로서 화려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레니에 3세와의 사이에 두딸 케롤라인과 스테파니, 그리고 아들 알베르 등 세명의 자녀를 낳아 모나코왕국의 여주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화려하고 행복하게만 보였던 그레이스 켈리는 19829월 돌연 모나코 모나코빌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해, 5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함으로써, 전세계인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만다.

         

        그런데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과 관련해서 많은 의문점들이 제기되고 있으며, 그녀의 사망에는 모나코왕실이 개입되어 있다는 음모론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정도로 청순하고 우아한 미모를 갖춘 그레이스 켈리가 허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막 올라섰을 무렵에, 약삭빠른 레니에왕이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반지로 그녀를 현혹시켜서, 결혼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작은 최빈국이었던 모나코왕국이 그레이스 켈리가 왕비가 된 이후에, 유럽에서 가장 많은 부자들이 방문하고, 피서를 즐기는 관광대국이자, 경제부국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유럽에서 가장 작고 빈약한 나라에 불과했던 모나코는 그레이스 켈리가 레니에왕과 결혼한 이후에, 유럽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게 되어, 엄청난 관광특수를 누리는 경제부국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모나코의 레니에 왕과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은 세기적인 정략결혼이자, 사기극이며, 사전에 기획된 음모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레이스 켈리 때문에 모나코가 경제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많은 학자들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왕실전문작가 로버트 레이시의 주장에 따르면, 모나코의 레니에왕이 그레이스 켈리와 결혼한 것은 순수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고 하며, 사전에 철저히 기획된 음모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당시 모나코왕국은 재정적으로 큰 위기가 닥친 상태였다고 하며, 레니에왕에게 후사도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합병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모나코왕국은 프랑스의 한 공국에 지나지 않았던 작은 지방국가였다.


         

        그런데 1950년대 전반 프랑스와 모나코의 협정에 의해서, 앞으로 레니에 3세에게 후사가 없거나, 모나코의 재정상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프랑스에 귀속시킨다는 약정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당시 국가의 재정고갈과 경제불황 등 큰 경제적 위기에 처해있었던 모나코는 영영 프랑스에게 귀속되어버릴 큰 위기에 빠지게 됐다.

         

        모나코의 왕국과 주권을 계속 유지시키기를 원했던 모나코의 레니에왕은 선박재벌이었던 오나시스를 만나 중대한 협의를 했다고 한다당시 선박재벌인 오나시스는 모나코에서 가장 큰 경제계의 거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나니스는 레니에왕에게 모나코왕국을 계속 존속시킬 수 있는 묘안을 하나 제안했다고 한다경제상황이 악화된 모나코를 재건시키기 위해서, 허리우드의 최고미녀배우를 배우자로 삼으라는 제안이었다.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있는 허리우드 미녀스타를 모나코의 왕비로 맞이한다면, 전세계의 메지저급 언론과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됨으로써, 관광도시로서의 모나코를 크게 홍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나코왕비를 전면에 내세워서 유럽의 정치계 거물와 경제계 거물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벌여나간다면, 유럽의 부자들을 모나코의 카지노장과 휴양지역으로 많이 유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나코의 쇠락을 막기 위해서, 레니에왕과 오나시스는 사전에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고 하며, 두사람의 음모에 의해서, 레니에왕과 그레이스 켈리의 세기적인 결혼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레니에왕과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은 사전에 고도의 전략과 치밀한 계산에 의해서, 기획되고 만들어진 정략결혼이자 사기극이라는 것이다.

        결코 레니에왕의 순수한 사랑은 아니었다고 로버트 레이시는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음모로 만들어진 두사람의 결혼 이후에, 실제로 모나코왕국은 엄청난 관광객들이 몰리게 되었고, 모나코의 카지노사업도 크게 번성해나갔으며, 모나코는 유럽의 부자들이 자주 방문하는 유럽 최대의 관광도시로 급부상했다.

         

        이렇게 모나코가 관광특수를 노리는 관광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모나코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의 인기가 크게 한몫을 했다는 데에는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레니에왕과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 때문에, 아무도 몰랐던 작은나라 모나코가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레니에왕과 오나시스 두사람이 음모한 데로, 그레이스 켈리가 왕비가 된 이후, 모나코의 경제상황이 크게 개선되어서, 모나코는 프랑스와의 합병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레이스 켈리의 인기와 미모 덕분에, 멸망할 뻔했던 모나코왕국이 멸망을 피하고, 왕실과 나라의 명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것이 모두 레니에왕과 오나시스의 치밀한 사전음모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라고 레이시는 주장한다.


         

        또한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도 의문투성이인데, 로버트 레이시의 주장에 따르면, 그레이스 켈리의 사망 또한 레니에왕과 모나코왕실이 사전에 음모해서 일으킨 인위적인 사건이라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는 레니에왕과 결혼해서 모나코의 왕비가 되었고, 겉으로는 화려한 삶을 살면서 행복해 보였지만, 실제로 그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레이스 켈리는 겉으로만 행복한 척 연기를 했다고 하며, 그녀는 규율이 엄격한 왕실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모나코왕실에서 그녀는 시어머니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고 하는데, 모나코왕비가 쓸 수 있는 왕비면류관인 티아라를 시어머니의 반대로 한번도 써보지 못했다고 한다.

         

        모나코왕실에서 그레이스 켈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적들과 견제세력에게 둘러쌓여 있었다고 한다.


         

        원래 성격이 자유분방했던 그레이스 켈리는 엄격한 궁중법도를 지켜야만 하는 왕실생활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고, 오랜 기간 동안 외롭고 소외된 느낌으로 살아갔다고 한다.


        실제로 그레이스 켈리는 오랫동안 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려서, 괴로운 생활을 보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왕실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까지 걸린 그레이스 켈리는 알콜중독과 약물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파티에서 만난 젊은남자들과 염문설까지 뿌리고 만다.

         

        허리우드에서 많은사람들의 사랑과 스포트라이터를 받으면서, 자유롭게 살았던 그녀에게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하는 모나코의 궁중은 감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며, 깊고깊은 구중궁궐에서의 속박된 삶은 그녀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왕실의 속박된 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서, 그녀는 알콜중독과 젊은남자와의 염문 등의 일탈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러던 1982년의 어느날 그레이스 켈리는 휴가에서 돌아오던 도중 의문의 자동차사고를 당하게 됐고, 곧바로 사망하고 만다.


         

        모나코의 산간도로에서 자동차를 몰고가던 그레이스 켈리는 갑자기 절벽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서 사망하고 말았으며, 차에 함께 타고있었던 딸 스테파니공주는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고 한다.

         

        이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그레이스 켈리의 운전실수 때문에 자동차사고가 일어났다고 알려졌지만, 의혹스러운 부분들이 많이 있다.

        로버트 레이시 등 일부 음모론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만년에 알콜중독에 빠지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등 왕실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그레이스 켈리를 모나코왕실에서 음모를 꾸며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활용가치를 상실하고 모나코왕실에 골칫거리로 전락한 그레이스 켈리를 모나코의 왕실사람들이 제거해버린 것이라고 한다.

        사실 그레이스 켈리는 만년에 품위를 떨어뜨리고 방탕한 생활에 빠진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녀는 알콜과 약물중독에 걸렸을 뿐만아니라, 별장으로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불러들여 은밀한 파티를 벌였으며, 숱한 스캔들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레이스 켈리의 이런 방탕한 생활이 외부로 새어나가게 되자, 모나코왕실의 권위와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어 버린 것인데, 이에 모나코왕실의 어른들은 더 이상 효용가치도 없고, 골치 아픈 존재로 전락해버린 그레이스 켈리를 제거하기로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모나코왕실에서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자동차사고를 기획했으며, 그레이스 켈리가 자동차사고로 사망한 것처럼 위장시켰다고 한다.

        이같은 이야기는 음모론자들의 주장인데, 실제로 그레이스 켈리의 사망에는 의문점들이 많이 있는 게 사실이다.

         

        당시 그레이스 켈리와 딸 스테파니공주는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고 난 후, 자동차를 몰고서 왕궁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몸이 성치않은 그레이스 켈리가 직접 차를 몰고간 것인데, 당연히 있어야 할 경호원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뒤에서 경호원들의 경호차량이 뒤따라서 왔어야 하는데, 사고 당시 경호원의 차량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모나코왕실에서 고의적으로 경호원들을 떼어놨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경호원이 몸이 불편한 그레이스 켈리를 대신해서 운전했더라면, 사고를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또한 그레이스 켈리가 몰고있던 자동차가 산간도로에서 뒤집혀졌는데, 그 사고후 구급차가 오는 데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사고차량은 오랜 시간 동안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동차사고가 난 후에, 경찰의 현장조사나 현장검증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하며, 사고 후 곧바로 자동차를 치워버려서. 정확한 사고원인을 조사할 수 없었다고 점도 매우 큰 의문점이다.

        상부에서 경찰에게 사고조사를 하지못하도록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부분이다.

         

        또한 그레이스 켈리의 딸 스테파니공주는 사고 후에 엄마가 운전도중에 뇌졸중 때문에 정신을 잃어서, 자동차사고가 났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뇌졸중 같은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직접 운전을 하도록 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으며, 더욱이 경호원 한사람도 붙이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여러가지 의혹점들 때문에, 로버트 레이시 같은 음모론자들은 그레이스 켈리가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사전에 기획된 모나코왕실의 음모에 의해서 살해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레이스 켈리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예단할 수가 없지만, 그렇게도 아름답고 우아했던 그녀의 죽음은 전세계의 수많은 팬들에게 크나큰 상처와 아쉬움을 남겼다.


         그레이스 켈리가 살았던 모나코의 궁전


        자신의 이름처럼 평생 우아한 아름다움을 잃지않았던 그레이스 켈리는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했으며, 극적인 드라마와도 같았다.

        한때 허리우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라는 예명을 간직했던 그레이스 켈리는 198252세의 젊은나이로 사망했지만,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허리우드에서 가장 우아한 미인이라는 타이틀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그레이스 켈리는 너무 예쁜 미모 때문에, 쇠락해갔던 모나코왕국를 살렸고, 너무 예쁜 미모 때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녀의 우아한 미모는 그녀의 삶과 죽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서프라이즈의 그레이스 켈리의 아버지 존 켈리의 이야기

         

        서프라이즈에서 방송된 내용인데, 그레이스 켈리의 아버지는 필라델피아에서 조정선수로 활동했던 스포츠인이었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의 아버지는 존 켈리인데,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이주민출신으로 한 때 필라델피아에서 벽돌을 나르는 벽돌공이었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 같은 당대 최고미녀배우의 아버지가 건설현장의 벽돌공이었다고 하니,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그런데 존 켈리는 선천적으로 우수한 체격과 뛰어난 체력을 갖고 있었고, 스포츠인들의 권유로 조정선수로 발탁되어 조정선수로 활동했다.


        생전에 벽돌공으로, 그리고 조정선수로 활동했던 그레이스 켈리의 아버지 존 켈리

         

        조정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존 켈리는 미국에서 치러지는 6개의 조정대회에 출전해서, 모두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미국의 유명한 조정스타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런데 영국에서 시행하는 세계최대 규모의 조정대회인 헨리 로열 레카타대회에 출전한 존 켈리에게 뜻밖의 출전금지 처분이 내려지는데, 그 이유는 존 켈 리가 벽돌공이라는 천한 노동자출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왕실에서 후원하는 헨리 로열 레카타조정대회는 전형적인 귀족스포츠였으며, 천한 노동자들은 출전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존 켈리는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여겨졌었는데, ‘헨리 로열 레카타조정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것은 단지 노동자출신이라는 것 말고도 또다른 음모가 숨겨져있었는데, 미국인이 우승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영국 주최측의 음모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존 켈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후 올림픽대회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승승장구했는데, 그 당시 미국 최고의 조정선수로 큰 명성을 쌓았던 것이다.

         

        존 켈리가 노동자출신이라고 해서 참여할 수 없었던 헨리 로열 레카타조정대회에는 수십년이 지난 후에, 존 켈리 대신 그의 아들이 출전해서 당당히 우승트로피를 획득하였고, 존 켈리의 한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벽돌공출신으로 조정선수가 되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명성을 떨쳤던 존 켈리가 다름 아닌 허리웃 최고의 미녀여배우이자, 모나코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의 아버지라고 한다.


         

        세계 제일가는 미녀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아버지가 벽돌공출신이라는 것도 놀라울 뿐만아니라, 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조정선수였다는 사실도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레이스 켈리의 아버지인 존 켈리의 사진을 보니까, 어깨가 딱 벌어진 근육형의 남자로서 얼굴이 반듯하게 잘생긴 미남이다.

         

        운동을 잘했던 미남인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그레이스 켈리는 허리우드영화계에 진출해서 당대 허리우드에서 제일가는 미인여배우로 명성을 떨쳤는데, 아버지는 그 같은 딸을 몹시 대견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의 아버지 존 켈리는 1960년 온식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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